윌리의 소방차

윌리의 소방차

(원제 : Willie’s Fire-Engine)
글/그림 찰스 키핑 | 옮김 유혜자 | 은나팔(현암사)

가온빛 추천 그림책

※ 1980년 초판 출간


국내에 출간된 찰스 키핑의 그림책 일곱 권을 소개하기로 맘먹고 지난 7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아직 절반밖에 하지를 못했네요. 10월엔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일주일에 한 권씩 꼬박꼬박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은 찰스 키핑의 그림책 연재 네 번째로 “윌리의 소방차”입니다. 그의 그림책 중 제가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이고, 찰스 키핑에게 푹 빠져들게 만든 책이죠. 묘한 분위기의 표지 그림에 끌려 작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채 책장을 넘겨보다 깜짝 놀랐었더랬습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림책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의 그림책이었거든요. ‘아, 그림책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며 그동안 그림책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편견을 모두 버리게 해 준 책이기도 합니다.

“윌리의 소방차”는 그림과 함께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글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보는 이의 느낌과 상상대로 그림을 한 장 한 장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찰스 키핑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꿈은 꿈 꾸는 자의 것임을 보여주는 그림책, 주어진 현실이 어떤 것이건 간에 그것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가슴 속에 붉게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과 꿈을 간직한 이들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그림책,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 얼마나 커다란 세상이 담겨 있는지 보여주는 그림책 “윌리의 소방차”, 함께 보시죠.

윌리의 소방차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든 주택가 한 켠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초라한 풍경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쓸만한 부속품들은 모두 뜯어가고 빈 껍데기만 남은 채 버려진 자동차,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을만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아무데나 오줌을 내갈기는 권태로운 개 한 마리.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마저 작은 불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빛바랜 이 거리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의기소침해지고 의욕을 잃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별반 차이 없는 건너편 풍경들 너머 저 멀리 금빛으로 하늘을 물들일만큼 휘황찬란한 성이 보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초라한 집 앞에 앉아 성을 바라보고 있는 이 아이의 이름은 윌리입니다. 윌리 곁에서 서성거리는 볼품 없는 작은 새와는 달리 저 멀리 성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아마도 윌리는 금빛으로 물든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며 날아오른 저 새처럼 힘껏 날아오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의 소방차

병약해 보이는 윌리가 동경하는 건 멋진 소방차에 올라탄 늠름한 소방수들입니다. 윌리의 침대 머리맡에는 소방차와 소방차를 끄는 힘센 말들,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용감한 소방수들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동경의 대상인 소방수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윌리에게 현실 속 영웅은 우유 배달부 마이크입니다. 소방차처럼 멋지진 않지만 커다란 마차에 우유를 싣고 거리를 누비는 마이크의 모습이 윌리에겐 제법 멋져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윌리는 언제나 마이크가 빈병을 수거하는 일을 도와주곤 합니다.

윌리의 소방차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무리 기다려도 마이크가 나타나지 않자 윌리는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맘먹습니다. 그런데 용감하게 길을 나서긴 했지만 우중충하고 어두침침한 거리에서 여린 윌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골목골목마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골목 끝에서 출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커다란 개와 매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새… “이쪽으로는 가기 싫어.”, “이쪽으로도 가기 싫어.”라며 겁을 집어먹은 채 맞닥뜨리는 현실로부터 자꾸만 도망쳐 버리는 윌리… 과연 무사히 마이크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윌리의 소방차

그렇게 거리를 헤매던 윌리에게 친구가 생겼습니다. 가까스로 우유 공장에 도착했지만 굳게 잠긴 문을 보며 실망하던 윌리에게 한 소녀가 다가와서는 마이크 아저씨의 집을 알고 있다면서 윌리의 손을 잡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윌리가 소녀에게 이끌려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껏 회색조 일관이었던 그림에 조금씩 색깔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소녀에게 이끌려 마침내 마이크가 있는 곳에 도착한 윌리. 그와 동시에 첫 장면부터 늘 윌리의 곁을 맴돌던 작은 새는 모습을 감춰버립니다. 윌리 곁을 힘 없이 서성이던 작은 새는 윌리가 소녀와 만난 이후로는 늘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이크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작은 새는 모습을 감춰 버립니다.

아마도 작은 새는 윌리의 마음의 변화를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요? 늘 자신의 집 주변만 맴돌던 외톨이 윌리에게 작은 새는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퍽퍽한 현실에 주눅들게 하고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을 겁먹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사납게 생긴 커다란 개와 매서운 부리를 한 새가 가로막고 있는 거리를 뚫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오른 윌리에게 더 이상 작은 새의 위로는 필요없게 된 것 아닐까요? 작은 새는 현실에 주눅든 윌리를, 힘차게 앞장 서 달리며 윌리를 이끄는 소녀는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픈 윌리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의 소방차

마이크를 찾아 공장 안에 들어서자 윌리를 반기듯 기다리고 있는 눈부시도록 멋진 소방차. 윌리는 달려가서 소방차를 꼭 끌어안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이의 품에 안기듯 말입니다.

윌리의 소방차

소녀를 따라 공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멋진 소방차와 말들을 구경하던 윌리의 눈앞에 드디어 마이크가 나타났습니다. 마이크는 더 이상 우유 배달부가 아니었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커다란 말에 올라탄 채 윌리를 맞이한 마이크는 윌리가 그또록 꿈꾸던 용감한 소방수였습니다.

그리고 마이크가 윌리에게 말합니다.

성에 불이 났단다.
우리가 불을 끄고 공주님을 구출해야 해.
어린이 구조대원이 한 명 필요하단다.

네가 우리와 함께 출동하지 않을래?

※ 그림책에서 “네가 우리와 함께 출동하지 않을래?” 라고 윌리에게 제안한 사람은 마이크가 아니고 마이크와 함께 있던 거인입니다. 본 소개글에서는 내용에 크게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거인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윌리의 소방차

윌리의 소방차

윌리의 소방차

윌리는 매일 밤 꿈꿔왔던 소방수로 순신간에 변신했어요.
공주가 성의 창문을 열고 도와달라고 외쳤어요.
윌리가 높은 사다리를 타고 공주를 구하러 갔어요.
윌리와 공주는 말 등에 급히 오른 다음
불에 활활 타오르는 성을 빠져나와 어둠을 향해 내달렸어요.

윌리의 소방차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영웅들을 꿈속에서 만난
윌리가 쿨쿨 단잠을 자고 있어요.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달리는 자욱한 연기를 뚫고 거침없이 달려가는 소방차, 싯벌건 불길 속에서 사다리를 타고 성에 올라가서 공주를 구출해 내는 윌리, 급하게 말 등에 올라타고 어둠을 향해 내달리는 윌리와 공주, 급박한 전개로 보는 이의 가슴 속에 잔뜩 풀무질을 해대던 이야기는 갑작스레 윌리가 잠든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결코 싱겁다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행복한 꿈에 빠져든 윌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왠지 내 가슴 속에 희망이 샘솟는 듯 합니다.

자기 얘기를 그린 건가? 찰스 키핑의 그림책들은 읽고 나면 늘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고, 그의 손 끝에서 번져나온 그림이니 그의 삶이 투영되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하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작은 돌멩이를 던져 우리들 마음 속에 결코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다는 점이 그의 그림책이 지닌 진정한 힘 아닐까 생각됩니다.

붉게 물든 그림 속에서 늘 꿈꾸던 멋진 소방수로 변신해 용감하게 공주를 구출해내고 힘차게 달려가는 윌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어떤 꿈을 꾸게 될까요? 오늘 밤 쌔근쌔근 단잠에 빠진 아이들 모습 바라보는 우리 엄마 아빠들은 또 어떤 희망과 기대를 마음 속에 품게 될까요?

우리 아이들의 가슴 속에 얼마나 커다란 세상이 담겨 있는지 보여주는 그림책 “윌리의 소방차”였습니다.


찰스 키핑의 그림책들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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