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왕

돼지왕

(원제 : King Pig)
글/그림 닉 블랜드 | 옮김 김혜진 | 천개의바람

2015 가온빛 BEST 101 선정작


그림책 “돼지왕”은 자기밖에 모르는 돼지왕과 그의 우매함으로 인해 시달리는 백성 양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양들의 입장에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돼지왕을 보며 한심해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할 겁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간결한 이야기 속에 담긴 해학과 풍자로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해 놓은 그림책 “돼지왕”. 돼지왕과 양들 사이에 벌어지는 재미난 해프닝, 지금 시작합니다.

돼지왕

그림책 “돼지왕”의 책표지를 넘기면 왕관을 쓴 돼지 한 마리가 보입니다. 자신의 발 아래를 살피는 돼지왕의 표정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듯합니다.

돼지왕

그리고 한 장 더 넘겨보면 돼지왕이 산책 중인 듯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저 멀리 성루가 보이고, 작은 동산 위엔 돼지왕이 지나온 흔적이 보입니다. 그런데, 흔적이 좀 이상합니다. 발자국이 아니라 바큇자국처럼 보입니다. 마차라도 타고 나온 걸까요?

돼지왕

아… 돼지왕이 지나온 흔적은 양들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수많은 양들이 돼지왕의 발 아래에서 무거운 널빤지를 등에 멘 채 힘겹게 걷고 또 걷는 동안 돼지왕은 양들을 밟고 서서 편안히 산책을 즐겼던 겁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던 그림 두 장에서 돼지왕 표정이 영 마뜩지 않아 보였던 이유는 뭘까요?

양들이 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지,
돼지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양들은 언제나 불만투성이였어.
이것도 투덜투덜, 저것도 투덜투덜.

우리는 위 그림 세 장만 보고도 양들이 왜 돼지왕을 좋아하지 않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정작 양들의 등을 짓밟아가며 산책을 즐긴 돼지왕 본인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리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양들을 탓합니다. 늘 투덜거리기만 하는 것들이라고 말이죠.(말풍선 몇 개면 요즘 세태를 풍자하는 신문의 만평으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일 듯합니다.)

돼지왕

성문 입구에 ‘양 출입금지’ 표지판이 버젓이 붙어 있는 걸 보니 돼지왕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고생만 한 양들은 돼지왕의 성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돼지왕이 성 안에서 따뜻하게 지내는 동안 하루종일 고생만 한 양들은 지붕 한 조각 없는 허허벌판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지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왕은 밤낮없이 언제라도 양들을 데려다 자기가 원하는 건 무엇이나 시키고 부려먹을 줄만 알았지 양들의 입장을 돌아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왕이랍시고,
돼지왕은 양들을 마음대로 부렸어.
자기가 원하는 건 무엇이나, 밤낮없이 언제라도 일을 시켰지.

하지만 딱 한 가지,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자기밖에 모르던 돼지왕은 급기야는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양들이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면서 도리어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는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이 더 근사해지면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합니다.

돼지왕

이렇게 돼지왕의 새로운 착취가 힘없는 백성들을 또 한 번 괴롭히게 됩니다. 돼지왕은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멋진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멋진 옷을 만들기 위해 양들을 자기 성으로 불러들여 양털에 알록달록 색깔을 입힌 후 마지막 털 한 올까지 모조리 털어 모아 자신의 옷을 만들게 합니다. 밤새도록 양들이 자신들의 털을 뽑아 새 옷을 만드는 동안 돼지왕은 쿨쿨 잠만 잤습니다.

돼지왕

돼지왕

아침이 되자 왕은 새로 만든 멋진 옷들을 번갈아 입어가며 백성들을 위한(?) 패션쇼를 벌입니다. 하지만 양들은 그 누구도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어떤 양도 돼지왕의 멋진 새옷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결국 돼지왕은 화가 나서 소리칩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해 줄 거냐고!”

돼지왕의 외침은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로 끝납니다. 질문이 아니라 호통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상황에서도 돼지왕은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돼지왕의 눈에는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걸까요? 자신이 화려한 옷을 입고 행진을 하는 동안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텨가며 무대를 떠받치고 있는 양들의 신음 소리가, 자신의 새 옷을 만들기 위해 털을 깎여 헐벗은 채 빗 속에 서 있는 양들의 모습이,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옷을 만드느라 퀭한 자신의 백성들의 피곤한 눈빛과 축 처진 어깨가 말입니다.

돼지왕

돼지왕의 호통으로 황당한 패션쇼는 끝이 나고 지친 양들은 힘없이 돌아갑니다. 그때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좀 착해지려고 노력이라도 하면 모를까.”

돼지왕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는 돼지왕의 귀에도 들어갔고 돼지 왕은 “나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착했다고!”라고 투덜거리며 자신의 성으로 돌아갑니다.

돼지왕은 양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그러다가 마침내,
양들을 위해 뭔가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지.

어리석고 자기밖에는 모르던 돼지왕의 가슴 속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미안한 마음’입니다. 드디어 돼지왕이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기 시작한 겁니다. 그 다음은 ‘양들을 위해 뭔가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돼지왕이 생각해낸 양들을 위한 착한 일은 과연 어떤 걸까요? 양들은 돼지왕의 선물을 마음에 들어했을까요?

위 그림만 보더라도 우리는 돼지왕이 양들을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행은 그다지 양들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성 안에서 돼지왕이 바라보는 곳은 양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니까요. 차가운 눈보라를 피해 얄팍한 천막 아래로 모여든 양들을 뒤로 한 채 돼지왕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투덜거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들을 생각하기 시작한 돼지왕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조금씩 양들의 마음을 살피다 보면 돼지왕도 점점 더 양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진정한 왕의 면모를 갖추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살피는 왕 말입니다.

King Pig

책표지의 ‘돼지왕’이란 제목을 보면 ‘돼지’는 아주 큼지막하게 써 놓고 ‘왕’은 아주 작게 써 놓았습니다. 돼지처럼 자기밖에 모른 채 살아가던 우매한 군주라도 백성들을 위하려는 마음을 진심으로 가슴에 담는다면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죠.

영문판 표지는 반대로 ‘King’은 큰 글씨, ‘Pig’는 작은 글씨입니다(왼쪽 그림 참조). 멋진 왕관과 화려한 옷을 걸친 채 왕좌에 앉아 있더라도 백성을 헤아리고 보살필 줄 모르는 왕은 한낱 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닐까요?

순서만 바뀌었을 뿐 비슷한 뜻이겠지만 저는 한글 제목에 담긴 의미가 더 마음에 듭니다. 영문 제목에 담긴 돼지왕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모든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듯이 어리석은 군주들의 말로는 한결같았으니까요. 하지만 한글 제목에 담긴 돼지왕은 희망이 있습니다. 돼지왕과 백성인 양들의 가슴 속에 변할 수 있다, 좋아질 수 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작은 씨앗이 돋아나는 해피엔딩입니다.

201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최소한 그림책 “돼지왕”의 양들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꿈꾸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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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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