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글/그림 김효은 | 문학동네
(발행일 : 2016/10/10)

2016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 2021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 선정작


받아든 그림책이 제법 두툼하고 무겁습니다. 찬찬히 그림책 겉장을 이리저리 훑어봅니다. 무료한 표정으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모습이 어찌나 익숙한지 꼭 눈앞 건너편 승강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드네요. 지하철 2호선 노선도처럼 표시한 작가 이름이 눈에 띕니다. 한참을 요리조리 뜯어보다 책장을 넘깁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길을.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싣고
한강을 두 번 건너며 땅 위와 아래를 오르내립니다.

아스라히 멀리 철교를 달리는 지하철이 그려진 면지 그림부터 지하철을 타고 내리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 개찰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장 한 장 담백하게 담겨있습니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깊고 어두운 땅 속 길을 힘차게 달리는 지하철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열심히 달려온 지하철과 지하철을 기다린 사람들의 만남 속에 담긴 그 특별한 이야기는 비어있는 일곱 개의 지하철 자리로 시선이 이동되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이른 새벽을 열면서 달려온 지하철이 멈춰 선 역은 합정역,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타기 위해  헐레벌떡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완주 씨를 본 지하철은 마음이 조급해져 ‘어서요, 어서!’하고 완주 씨를 재촉합니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있는 힘껏 달려온 완주 씨는 어린시절 학교 달리기 선수였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달리는 완주씨 뒤로 어린 시절 이어달리기를 하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요. 예쁜 딸 얼굴 조금이라도 더 보고싶은 마음에 완주씨는 오늘도 달립니다.

내가 이래 봬도 꼴등으로 바통을 받아도
일등으로 골인했던 우리 학교 달리기 선수였거든.
예쁜 딸 한 번 더 보느라 출근길은 늘 꼴등이지만
퇴근길엔 일등으로 달려 집에 갈 거야.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시청역에서 탄 할머니에게서는 짭짤하고 시원한 냄새가 나요. 할머니가 꾸려 온 하얀 보따리 속에는 할머니가 직접 물질해서 잡은 바다 내음 가득한 문어며 전복이 들어있어요. 딸에게 맛난 밥상을 차려주고픈 할머니의 마음을 싣고 지하철은 달려갑니다.

집안일에 치여 눈코뜰새 없이 바쁜 두 아이 엄마 유선씨는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지하철에 올랐어요. 구의역에서 탄 재성 아저씨는 신발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대요. 손때 묻은 도구들로 가득 찬 재성 아저씨의 작은 구두 수선방에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비쳐들어옵니다.

하루 종일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옮겨 다니느라 지친 나윤이는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 무게를 못 이기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잠들었어요. 한 족에 천원짜리 장갑을 파는 구공철 아저씨가 서둘러 다음 칸으로 떠나고 난 뒤 신도림 역에서 도영  씨가 지하철을 탔어요.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 많은 도영 씨, 겉모습은 투박해 보이지만 옆자리 꾸벅꾸벅 졸고있는 꼬마에게 슬며시 자기 팔을 내어주는 마음 따뜻한 청년입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만납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할머니의
못다 판 이야깃거리와

일곱살 아들 생일에 사 가는
고소한 치킨 냄새를

전화기 너머 안부 인사와
하얀 셔츠에 밴 시큰한 땀 냄새.

낡은 구두와 그것을 어루만지는 오후의 햇빛.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가득 싣고
덜컹덜컹덜컹덜컹
오늘도 우리는 달립니다.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는 달립니다’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싣고 지하철 한 칸에 모인 일곱 사람들의 일곱 빛깔 이야기는 어느 새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묵묵히 달려온 길, 그 길을 돌아봅니다. 여기까지 무사히 달려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지고 그저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세상 모든 이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밀려오네요. 오늘 하루도 각자 저마다의 몫을 다하며 열심히 달려온 우리, 바로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공간 지하철을 무대로 보이지 않는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그려낸 “나는 지하철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오랜 시간 공들이고 고민했을까요? 세밀한 펜선과 먹의 번짐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삶을 애잔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줍니다. 그림책 한 권이 건네는 위로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빨주노초파남보, 빠지는 색 하나 없이 다 고와.
자- 한 족에 천 원, 천 원에 모십니다!

지하철 칸과 칸 사이를 오가며 빠지는 색 없이 다 고운 일곱 빛깔 색색의 장갑을 파는 구공철 씨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여운이 되어 남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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