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과 로지
책표지 : 그림책공작소
허먼과 로지

(원제 : Herman and Rosie)
글/그림 거스 고든 | 옮김 김서정 | 그림책공작소
(발행일 : 2016/09/30)


그림책 “허먼과 로지”의 표지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레코드판 종이 케이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보에를 연주하는 허먼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로지가 그려진 그림책 표지에서 오랜 향수가 느껴지네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위에서 재생되는 따뜻한 소리의 촉감이 그리운 것은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일까요, 쓸쓸한 계절 탓일까요?

허먼과 로지

어느 복잡한 도시의 작고 낡은 아파트에 허먼이 살고있었어요. 허먼은 화분 가꾸기, 오보에 연주하기, 보이젠베리 요구르트, 겨울날 핫도그 냄새, 바다에 관한 영화 보기를 좋아했죠. 허먼이 살고 있는 옆 아파트 5층에는 팬케이크, 오래된 재즈 음악 듣기, 여름날 산들 바람, 토피 사탕, 비상 계단에 앉아 노래 부르기와 바다에 관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로지가 살고 있었어요.

이웃해 살고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허먼과 로지는 음악을 사랑하고 바다에 관한 영화 보기를 좋아하고 작고 소소한 것들이 주는 행복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어요.

허먼과 로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웅성거리는 소리, 자동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들로 가득찬 도시는 활력을 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외로운 곳이기도 했죠.

왼쪽 페이지는 모든 것이 빠르게 다가오고 사라지는 시끌벅적한 도시의 현란함과 젊은 기운으로 가득해 보입니다. 오른쪽 그림에는 까페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허먼과 로지가 보여요. 무언가 할 일들로 넘쳐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앉아 차 한 잔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왠지 모를 외로움이 물씬 느껴지네요. 도시가 가진 두 얼굴이 그림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허먼과 로지

허먼은 전화로 물건을 파는 일을 했어요. 하지만 물건을 파는 일 보다는 사람들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했죠. 로지는 도시 외각의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했어요. 오후에는 노래 수업을 받으러 다녔구요. 목요일 밤에는 시내 작은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 부르는 근사한 노래 소리에 취한 허먼은 한 밤 중 오보에를 들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근사한 재즈 곡을 연주했어요. 옆 아파트에 사는 로지는 허먼의 오보에 연주를 듣고 그 멜로디를 잊지 않기 위해 틈만 나면 흥얼 거렸어요.

허먼과 로지

며칠 동안, 허먼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로지의 마음 속에는 멋진 연주가 머물러 있었어요.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도 공원에서도 서점에서도 두 사람은 지난 밤 들었던 음악을 떠올리며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는 감동을 품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애타게 하네요.

우체국 소인이 찍힌 낡은 엽서에 슥슥 그려진 그림들이 이 이야기의 전체 구성을 지배하고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툭툭 건드립니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아슬아슬 스쳐 지나는 허먼과 로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처럼 말이죠.

허먼과 로지

어느날, 허먼은 물건을 많이 팔지 못해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로지 역시 클럽이 문을 닫는 바람에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죠.

허먼은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났어요.
그날 밤에는 오보에를 연주할 기분이 아니었어요.

로지 역시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었어요.

도시는 다른 때보다
더 복잡하고 시끄럽고 캄캄했어요.

활기차게 웅성거리는 소리, 자동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도시가 이제는 복잡하고 시끄럽고 캄캄하게 느껴집니다. 헤어나오기 힘든 상실감에 빠진 허먼과 로지는더 이상 음악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로지는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았고 허먼 역시 오보에를 연주하지 않았죠.

허먼과 로지

그렇게 몇 주가 지나도록 집에만 머물렀던 로지는 어느 날 아침 문득 토피 사탕이 생각났어요. 오랜 시간 집에만 머물렀던 허먼도 어느 날 아침 문득 보이젠베리 요구르트가 먹고 싶어졌죠. 둘은 길을 걷고 걸어 같은 장소에 멈춰섰어요. (앗, 드디어 하고 기대를 했지만) 그들은 각자 핫도그를 하나씩 사 먹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랜만에 똑같은 장소에서 맛본 엄청나게 맛있는 핫도그가 이들의 음악적 감성을 똑같이 흔들어 놓았을까요?

그날 밤 허먼은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 오보에로 멋진 재즈 음악을 연주했어요. 오래도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허먼의 오보에 연주를 다시 듣게 된 로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음악 소리를 따라갔어요.

밖으로 나가… 위로 올라가고… 옥상을 건너서…마침내!

마침내!

허먼과 로지

도시의 불빛이 달빛과 잘 어우러지는 참 아름다운 밤입니다.^^

앞 면지의 복잡한 지도 속에 ‘허먼이 사는 집’과 ‘로지가 사는 집’ 뒤쪽으로 ‘엄청나게 맛있는 핫도그 집’이 있었다면 뒷 면지에는 똑같은 지도지만 ‘행복한 허먼이 사는 집’과 ‘즐거운 로지가 사는 집’이 나와요. 물론 ‘엄청나게 맛있는 핫도그 집’만은 변함이 없죠. 면지만으로도 해피엔딩을 예고하는 허먼과 로지의 이야기, 이 쓸쓸한 가을을 촉촉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잔잔한 러브 스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오늘 내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하루를 하나하나 꺼내서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허먼과 로지의 마음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의 모습을 다양한 느낌으로 보여주는 작가 거스 고든의 따뜻하면서도 아련하고 대담하고 감각적이면서 유머러스한 그림들이 이야기의 풍미를 더욱 살려주는 그림책 “허먼과 로지”, 쌀쌀한 가을날 따뜻한 커피와 함께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재즈 음악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그림책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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