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

(원제 : Red – A Crayon’s Story)
글/그림 마이클 홀 | 옮김 김하늬 | 봄봄
(발행 : 2017/02/10)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파란 크레용이 하얀 배경을 파랗게 칠하고 있어요. 커다랗게 쓰인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라는 그림책 제목도 파란색으로 칠했고요. 그런데 파란 크레용이 입고 있는 빨간 옷 때문인지 살짝 혼란스럽네요. 빨간색 옷을 입은 파란 크레용이라니……  지켜보던 주황색 크래용도 이상한지 ‘뭐야?’라고 말하고 있고 노란 크레용은 ‘아이고’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크레용은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고요. 아이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집니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연필이에요. 파란 크레용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느 연필의 이야기, 한 번 들어 볼까요?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그 애는 빨강이었어요!

느낌표까지 찍어가며 그 애는 ‘빨강’이라고 연필이 강력하게 말했지만…… 누가 보기에도 저 아이는 ‘파랑’인걸요. 하지만 삐죽이 위아래로 조금 나와있는 본질인 파랑과 달리 파랑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빨간색 옷, 그리고 선명하게 찍힌 ‘빨강’이라는 글자 때문에 무심코 보면 다들 이 아이를 빨강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파란 크레용도 자신을 당연히 빨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그러니 빨간색을 그렇게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죠(아니 그려낼 수 없었죠). 크레용이 그린 그림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서야 소방차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다리, 호스, 경광등을 보고 말이에요. 우리들 사이에 색깔에 대한 인식이 참 깊게 박혀있는 모양인가 봅니다. 열심히 소방차를 그리는 빨강(아니 파랑이죠?)을 쳐다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올리브색 크레용의 마음이 제 마음 같아요.

열심히 하고 있지만 빨강의 실력이 영 신통치 않다 생각한 선생님도 부모님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구들도 다들 도와주려 했지만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전혀 없자 모두들 한 마디씩 했어요. 게으른 거라고,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물론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하는 이도 있었어요. 나아질 거라면서 말이죠. 빨간색인지 모르겠다는 호박색의 말에 코코아색은 공장에서부터 빨강이었다고 말합니다.

파랑 겉에 씌워진 빨강이라는 허울 때문에 다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더 노력하라고만 합니다. 더 빨개지라고만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필마저도 빨강이가 너무 뭉툭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연필깎이로 빨강을 깎아주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이 말하는 색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빨강의 온몸은 상처 투성이입니다. 그 마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모두가 도와주었고
빨강이도 노력했지만
빨강이는 계속 빨간색을 잘 그리지 못했어요.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어느 날 자두색 크레용이 다가와 빨강에게 말했어요. 자신이 그린 배에게 파란 바다를 그려달라고요. 빨강에게 파란 바다를 그려달라니……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빨강은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자두가 쿨~하게 말합니다.

그냥 한번 해 봐!

잘 해봐, 열심히 해봐, 제대로 해봐가 아닌 ‘그냥 한 번 해 봐’라는 자두의 한 마디에 빨강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됩니다. 이름하여 ‘빨강의 파란 바다 그리기!’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자두의 격려에 힘을 얻은 파랑은 파란색으로 그려낼 수 있는 온갖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내고서야 깨닫습니다. 자신은 파랑이었음을… 그래요. 그 애는 빨강이 아닌 파랑이었어요.

난 파랑이야!

이제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된 파랑! 지금껏 빨강이라 생각하고 그려온 그림들이 자신감이 결여되어 보이고 잔뜩 주눅 든 느낌이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난 후 그린 그림에서는 활기가 넘쳐나고 행복이 묻어납니다.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

그동안 파랑을 빨강으로 보며 애태웠던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어요. 정말 예쁜 파란색이라고, 재능이 하늘을 찌른다고, 노랑은 같이 초록 도마뱀을 그릴 거라고 말했고, 갈색은 파란 딸기 그림이 제일 멋졌다며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냅니다. 빨강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 너무 많았는데 파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전혀 다른 아이가 되었습니다. 빨강인 줄 알았던 파랑이 자신을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강요된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었던 파랑, 존재의 본질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허울만 바라보고 걱정하고 우려하는 크레용 집단의 모습이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짧고 간결한 이야기 속에 선명한 빨간 옷을 입은 파란 크레용을 등장시킨 강렬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그림책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 우리 삶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여정 아닐까요? 고난과 역경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 여정의 끝이 행복으로 물들기를… 반짝반짝 빛날 수 있기를… 우리의 파랑처럼 말이에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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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hee Ju
seonghee Ju
2017/10/21 15:03

와우…! 그림책 내용을 이렇게 자세히 읽어볼수 있어서 저는 너무 좋네요..ㅎ 그리고 늘 항상 생각해보게 되는….가온빛에 소개된 그림책들…ㅋㅋ 나는 원래 무슨 색깔로 태어난걸까…지금은 무슨 색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내 색깔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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