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이지 않아요

나는 보이지 않아요

(원제 : Sahar som inte syns)
글 안나 플라트 | 그림 리 쇠데르베리 | 옮김 권지현 | 씨드북
(발행 : 2018/03/27)


흐드러진 장미 꽃들 사이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 사하르, 하지만 사하르의 커다란 두 눈에 뭔지 모를 슬픔이 엿보입니다. 꼭 다문 입, 수줍은 듯 뒤로 감춘 두 손은 누군가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원래부터 사하르가 수줍고 소심한 아이였던 건 아니었어요. 파도 타기를 좋아하고 그맘 때 아이들이 그렇듯 우표 모으기를 좋아하는 아이에요. 우표에 새겨진 글자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하고 글자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하는, 사하르는 그런 아이랍니다.

나는 보이지 않아요

행성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하르, 하지만 사하르 주위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하르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학교 친구들은 어느 날부터 사하르를 없는 아이처럼 취급하기 시작했어요. 사하르만 생일 초대에 빼버렸고 같이 놀자고 하지도 않았죠.

그때부터 사하르의 모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어요.

캄캄하고 아득한 우주 안에 혼자 고립된 느낌, 사하르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이겠죠. 투명한 빗방울처럼 스며들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 기체로 만들어진 해왕성 같은 존재처럼 자신이 느껴졌을 거예요.

나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소리도 지르고 몸부림치고 말썽도 부려보았지만 아무도 사하르를 보지 못했어요. 점차 사하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사하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사하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요. 공기처럼 물처럼 점점 투명하게 변해가는 사하르, 세상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듯 사하르도 세상에 등을 돌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하지만 사하르는 가끔 겁이 났어요.
겉모습이 사라졌으니 속마음도 텅 빌 것만 같았거든요.
기체로 만들어진 해왕성처럼 될 것 같았어요.
지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해왕성에는 언제나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요.

모든 것이 점점 투명해져 가는 대신 사하르가 신고 있는 노란 장화만 선명하게 빛을 발합니다. 그 노란 장화가 나 여기 있다고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제발 나를 돌아봐 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쓸쓸하게 얼어붙은 사하르의 마음처럼 세상은 온통 무채색으로 뒤덮인 차가운 겨울입니다.

나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왠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둘러보니 한 아이가 사하르를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그 따스한 눈빛에 투명하게 변해가던 사하르가 되살아납니다. 사하르의 선명한 머리색이 되살아났고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던 사하르 주변이 사르르 녹으며 되살아났어요. 눈 덮인 땅속에서 꽃들이 피어나고 저 멀리 사슴들은 길을 걷다 말고 사하르를 돌아보고 있어요. 먼 발치에서도 사하르가 아주 잘 보이는 것처럼.

두 아이의 사이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자 사하르는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아이들 주변에 만발하고 팔랑팔랑 나비가 날고 주변이 화사한 색상으로 물들어갑니다. 늘 겨울이었던 외롭고 쓸쓸했던 사하르의 마음에 봄이 찾아온 것이죠. 친구 시리의 눈길만으로, 사하르를 보고 흔들어주던 손짓만으로…….

나는 보이지 않아요

이 모든 게 꿈이었을까 겁이 났지만 다음 날에도 사하르는 친구 시리를 만날 수 있었어요. 봄의 요정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시리가 사하르를 반깁니다.

그날부터 두 친구는 매일 함께 놀았어요.
사하르의 모습도 점점 더 밝고 뚜렷해졌어요.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사하르도 빛이 났어요.
놀이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하르를 볼 수 있었어요.

나를 반겨줄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일까요? 눈뜨고 맞이하는 아침이 새삼 반갑고 매일 똑같게 느껴졌던 세상이 달라 보이겠죠. 사하르의 커다란 눈동자가 환하게 빛이 납니다. 밝게 웃는 두 아이의 미소가 세상을 밝힙니다. 외로워하던 사하르 주변을 맴돌던 고양이가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요.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지켜 주는 시리의 따스한 관심이 사하르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주었습니다.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사하르에게 기꺼이 자신의 온기를 나눠준 시리, 그 따스한 마음이 존재하는 한 세상에는 더 이상 투명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쁜 경험을 디딤돌 삼아 한 발 앞으로 내딛고 나아갈 수 있도록 세상 곳곳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그림책 “나는 보이지 않아요”,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그림책입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 보이지 않는 아이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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