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혼

잃어버린 영혼

(원제 : Zgubiona dusza)
글 올가 토카르축 | 그림 요안나 콘세이요 | 옮김 이지원 | 사계절
(발행 : 2018/10/24)


빛바랜 듯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표지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저편으로 돌려놓은 의자, 등받이에 무심하게 걸쳐놓은 검은 외투,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날 듯 꾸려놓은 작은 여행 가방에서 뭔가 쓸쓸한 느낌이 밀려옵니다. 외투의 주인은 이곳에 얼마나 머물렀을까요? 이 쓸쓸한 풍경에 온기를 더해보겠다는 듯 뻗어 나오고 있는 초록 잎사귀가 그가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소설 “Flights”로 2018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올가 토카르축과 요안나 콘세이요가 함께 작업한 그림책으로 삶의 쳇바퀴 속에 갇혀 여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속도를 늦추고 고개 들어 찬찬히 삶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오래된 벽지 무늬가 새겨진 면지를 넘기면 공원 풍경이 담긴 모노톤의 그림과 만납니다. 눈 내린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있어요. 공원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얼음판 위에서 노느라 분주해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과 달리 한 남자가 바쁘게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낸 장면입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잃어버린 영혼

일에만 몰두해있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던 얀이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어느 날 출장길 호텔방에서 잠을 자다 숨 막힐 것 같은 기분에 깨어난 얀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에 무슨 일로 어떻게 온 건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어요. 다음 날 의사는 얀에게 이런 진단을 내려줍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의사가 내려준 처방은 단 하나,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어요.

잃어버린 영혼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을 구해 날마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는 얀, 몇 달이 지나자 머리가 길게 자라고 수염은 허리에 닿을 정도로 자라났지만 얀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얀은 날마다 작은 창가 탁자에 앉아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영혼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첫 장에서 얀이 영혼을 잃어버린 사연을 소개하고 난 뒤에는 글 없이 요한나 콘세이요의 먹먹하리만치 깊이 가라앉은 그림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숲속 단정하게 자리 잡은 작은 집 한 채, 공원 텅 빈 벤치, 희미하게 그림자가 비치는 현관문, 불 꺼진 공원, 얀의 집 창가…… 그림책 왼쪽에는 바깥 풍경이 그려지고 오른쪽에는 영혼을 기다리는 얀의 집안 풍경이 펼쳐져요. 언젠가 잃어버린 것들, 혹은 잊고 살았던 것들,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경들이 오랜 기억들의 끄트머리를 꺼집어낼 듯 말 듯 마음 한 켠을 쿠욱 찌르는 느낌…

잃어버린 영혼

그림책 왼쪽에는 계속 장소가 바뀌어 다른 풍경이 보이고 있어요. 어쩌면 이것들은 잊고 지냈던 얀의 오래된 기억들일지도 모릅니다. 숲에서 공원 벤치로 어느 식당으로 변하는 왼쪽 풍경 속에 언제부턴가 한 아이가 등장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어요.

그림책 오른쪽에는 일정하게 얀의 집 내부 창가에 놓인 탁자를 비추고 있는데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요. 조그마한 화분에서는 식물이 자라고 얀의 머리가 텁수룩하게 길어지고… 처음에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얀의 작은 창은 커튼이 살짝 걷히면서 바깥 풍경을 아스라히 보여줍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어느 날 창밖으로 아득하게 보였던 풍경 속에 작은 오솔길이 들어옵니다. 왼편에 보이는 길과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누군가 저 길을 따라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묘한 기대감에 마음이 설렙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쪽 편에 놓인 식물들도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어느 오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앞에 그가 잃어버린 영혼이 서 있었습니다. 영혼은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영혼은 숨을 헐떡였습니다.

오솔길을 달려와 드디어 자신의 주인을 찾아낸 영혼, 얼마나 오랜 시간 먼 기억 속에서 영혼 혼자 헤맸을까요?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영혼이 조용히 들여다보는 작은 창은 얀의 마음일 것입니다. 영혼과 얀은 이렇게 창 하나를 두고 마주 섰어요.

얀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섰을 때 그림책에 나왔던 트레이싱페이퍼는 다시 오른쪽에 등장해 희미하게 얀을 비추고 있습니다. 트레이싱페이퍼는 창가 이쪽에서 보면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되어 영혼이 자신의 주인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다음 페이지에서 보면 얀의 입장에서 자신을 찾아온 영혼을 희미하게 만들어 혼란과 설렘이 뒤섞인 두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어긋난 시간을 거쳐 드디어 만난 영혼과 얀,  잃어버렸던 영혼과 얀은 서로를 바라보고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만나 다행이라는 듯… 그토록 오랜 시간 잃어버린채 기다렸던 서로를 담담하게 보고 있어요.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주인이 아직도 낯선 것일까요? 어디쯤에서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걸까 생각하고 있는 중일까요? 아니면  폐부를 찌르는 알싸한 아픔과 뭉클함을 견뎌내고 있는 걸까요?

둘 사이에 오래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영혼과 얀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마주 보고 있어요. 영혼이 다시 찾아온 얀의 마음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미소가 번져갑니다. 흑백이었던 그림에 색상이 덧입혀졌어요. 환하고 밝게 변한 얀의 집에 따스한 온기가 감돌아요. 늘어져 누워있는 고양이가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 후로 얀은 영혼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어요. 정원 구덩이에 묻은 시계와 트렁크에서 자라난 꽃과 나무와 풀들로 무성하게 뒤덮인 작은 집, 영혼을 기다린 얀의 작은 집 지붕이 주홍색이었네요. 처음처럼 높은 곳에서 얀의 집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구겨지고 빛바랜 종이에 색연필과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잘 알려진 요한나 콘세이요, 고유의 질감이 잘 드러나도록 그리는 그녀의 그림들은 잃어버린 영혼이 찬찬히 본디 육신을 찾아와 만난다는 느리고 섬세한 이 그림책 속에서 잔잔하게 빛을 발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몽환적인 그림책, 늦가을 감성에 꼭 어울리는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올 한 해 나와 함께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수고한 내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 보세요.

※ 앞 페이지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양한 의미를 지닌 그림들이 숨어있어요. 눈밭에 떨어뜨린 털실 뭉치, 얼음판에서 넘어진 아이와 그 아이의 시린 손을 위해 자신의 장갑을 내어주는 체크무늬 코트를 입은 아이, 그리고 저쪽 한 편에서 한 남자가 털실 뭉치를 쥐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얀을 찾아온 영혼은 오래전 공원에서 장갑을 건네주던 아이 모습입니다. 장갑을 건네주던 아이와 받은 아이, 둘 중에 누가 얀일까요? 저는 왠지 장갑을 받은 아이가 얀일 것 같아요. 영혼은 가장 따스했던 기억 속 가장 좋아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거든요.

영혼을 기다리던 얀처럼 한숨 돌리고 찬찬히 그림을 보고 또 살펴보면서 그림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찾아보세요. “잃어버린 영혼”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림책의 매력을 가득 담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 누가 진짜 나일까?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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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규
최대규
2020/08/18 11:25

휴가는 잘 다녀오셨는지요?
다시 가온빛 뉴스레터를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몽환적인 그림과 스토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아직도 바쁘게 뛰어가며 겨우 가끔씩 영혼이 따라오는 것을
복 이야기를 나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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