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차 운전사

소금차 운전사

(원제 : The Gritterman)
글/그림 올란도 위크스 | 옮김 홍한결 | 단추

(발행 : 2019/01/15)

2019 가온빛 추천 BEST 101 선정작


눈꽃이 가득 핀 나무들 사잇길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묵묵히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하얀 여백 위에 푸른 톤으로 그린 숲의 풍경이 시퍼렇게 날선 한겨울 추위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름이면 잠시 아이스크림 차를 모는 이 남자의 본래 직업은 한 겨울 빙판이 된 도로 위에 소금 뿌리는 일을 하는 소금차 운전사입니다.

소금차 운전사

신통치는 않지만 겨울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여름이나 한 겨울 꽁꽁 언 도로 위에 소금을 뿌릴 때나 남자의 낡은 차 지붕 위에는 아이스크림 모형 두 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차임벨을 울립니다. 비록 한쪽이 녹아내리긴 했지만 차임벨을 울리면서 돌아가는 지붕 위 아이스크림 광고등은 어쩌면 남자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일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시의회에서 제설 작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이 남자에게 통보했거든요. 달랑 몇 글자로 평생을 해온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전해온 편지를 읽어 내리는 남자의 마음은 꽤나 복잡해 보입니다.

소금차 운전사

지구가 계속 더워지고 있기에 소금차 운전사는 곧 사라질 직업이라고들 합니다.

사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다.
나들이옷을 입으면 비가 오고,
비옷을 입으면 해가 나는 법,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 힘든 작업을 해오면서도 사람들이 고마움을 전해올 때면 누구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소금차 운전사, 곧 사라질 직업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터였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소금차 운전사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밤 폭설이 온다는 예보에 남자는 차분히 마지막 운행을 준비합니다.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 아내의 장례식, 신비로움 가득한 달, 단출한 저녁 식사… 창밖에 쏟아지는 눈보라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남자는 조용히 생각에 잠깁니다.

눈이란 녀석은 희한하다.
떨어지면서 계속 모양이 바뀐다.
이 모양이 됐다가 또 저 모양이 됐다가,
끝없이 바뀐다.
그러다가 어딘가에 내려앉는데,
그 앉은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경우가 없다.
저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훨훨 내리면서,
저마다 제 놓일 자리를 찾아간다.

소금차 운전사

내복, 스웨터, 목도리, 아버지가 쓰던 모자, 오래 신어서 발뒤꿈치 쪽에 구멍이 난 이중 방수 장화… 차근차근 옷을 챙겨 입으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은 홀로 크리스마스이브를 준비하는 산타클로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두가 들떠있는 떠들썩한 밤, 홀로 세상의 즐거움을 준비하는 쓸쓸한 산타클로스.

뚜벅뚜벅 눈길을 걸어 이제는 와이퍼, 자동차 문짝, 히터까지 어디 하나 성한 데 없는 낡은 소금차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지막 운행을 앞둔 소금차의 시동이 단번에 시동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오늘 운수가 좋으려나 하는 기대감을 품는 남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소금을 내어주던 짙푸른 바다를 꼭 닮은 깊고 푸른 겨울밤, 소금처럼 하얀 눈을 가르며 소금차 운전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터덜 거리는 소금차를 잘 달래면서…

좀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그렇지 않다.
소금 뿌리는 데는 최적의 속도가 있어서,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꼼꼼히 해야 하는 법.

소금차 운전사

어두운 밤, 소금차를 몰고 가는 남자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사라지는 흰곰, 도랑물에서 꼬리를 물고 헤엄치는 외뿔고래, 벚나무에 내려앉은 천사, 고속도로 나들목에 떨어진 별들이 보입니다. 상향등 불빛에 비친 눈발, 마을 곳곳 익숙하고 친근한 가게들… 모퉁이를 돌아 소금차를 몰고 찬찬히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

가끔은 온 세상에 나 혼자 깨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외롭지 않냐고? 아니.
혼자라는 것과 외롭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세상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살기에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남자, 동이 틀 때까지 자신의 맡은 임무를 묵묵히 마친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난 소금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얽매일 것 없는 남자는 생각합니다.

내 일의 끝은 내가 정한다.
버스는 정류장이 있고, 기차는 선로가 있지만,
나는 자유롭다.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

필요 없는 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사라진다는 것은 끝을 말하는 것일까요?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는 어디로 떠난 걸까요?

이 그림책의 작가 올란도 위크스는 한때 록 밴드의 리드 보컬로 활동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인디 록 밴드 매커비스(The Maccabees)를 이끌며 14년 동안 활동을 하다 밴드 해체 후 고별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써왔던 이 그림책 “소금차 운전사”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14년간 활동했던 밴드의 해체를 앞둔 올란도 위크스의 마음 역시 소금차 운전사의 마음은 아니었을지…

세상에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가득 담고 있는 그림책 “소금차 운전사”, 눈이 내린 도로 위에 소금 뿌리는 일을 평생 동안 해왔던 한 노인이 독백 형식으로 들려주는 삶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이 그림책 속에는 가슴 먹먹한 스토리만큼이나 서정적이면서도 쓸쓸한 풍경이 아득하게 담겨있습니다.

책과 함께 낸 앨범은 아래에서 감상해 보세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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