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책

빨강 책 – 우연한 만남

(원제 : The Red Book)
글/그림 바바라 리만 | 북극곰
(발행 : 2019/05/10)

2019 가온빛 추천 BEST 101 선정작
※ 2005년 칼데콧 명예상 수상작


오늘 소개할 “빨강 책”은 글 없는 그림책입니다. 환상 세계를 다룬 글 없는 그림책 하면 어떤 작가를 떠올리시나요? 저는 데이비드 위즈너, 레이먼드 브릭스, 에런 베커, 이수지, 이지현, 이기훈 등의 작가들이 떠오릅니다.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환상의 공간, 글자마저 사라진 그림책 속 세상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마법의 장소로 변신을 하죠.

바바라 리만 역시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상상으로 이어지고 상상 속에서 열리는 세상, “빨강 책”이 불러오는 세상입니다. 바바라 리만은 자신의 첫 작품인 이 그림책으로 2005년 칼데콧 명예상을 수상했습니다.

빨강 책

하얀 눈이 끝없이 쏟아지는 날이에요. 꼬마 소녀가 학교에 가고 있는데 무언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소녀의 눈길을 끈 것은 하얀 눈더미 속에서 일부만 모습을 드러낸 빨강 책 한 권. 어쩌다 이 책은 이곳에 놓여있게 된 걸까요? 소녀는 빨강 책을 품에 안고 학교에 갑니다.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에서인지 빨강 책을 품에 안은 소녀가 방긋 미소를 짓습니다. 빨강 책은 소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어요. 결국 소녀는 못 견디고 수업 중에 슬며시 책을 꺼내 펼쳐보았어요.

빨강 책

우리가 보고 있는 책 속에 소녀가 보고 있는 책이 펼쳐집니다. 빨강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초록 섬들, 그 많은 섬 가운데 하나의 섬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 섬 한쪽 해변가를 걷고 있는 한 소년. 렌즈의 초점을 조절해 피사체에 접근해 가듯 그림책 페이지가 조금씩 조금씩 시야를 좁혀가며 한 장소에 있는 누군가에게 접근해 갑니다.

소녀가 사는 곳과 정반대의 기후를 가진 그곳에서 해변을 걷고 있던 소년. 놀랍게도 소년 역시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어요. 방금 전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빨강 책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소년이 발견한 것은 소녀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빨강 책. 모래 사이에 슬쩍 나와있는 모양새까지도 소녀가 눈 속에서 빨강 책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년이 펼친 책 속 세상이에요. 그곳에 등장하는 회색 도시, 수많은 건물들 중 한 곳,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소녀…

그때 빨강 책에 빠져있던 소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창밖을 바라봅니다. 소녀가 읽고 있던 책 속에서는 소년이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어요.

빨강 책

섬에 사는 소년이 이쪽을 바라봅니다. 소년의 책 속에는 소녀가 창밖을 보고 있고 그 책 속에는 이쪽을 바라보는 소년이 나오고 있어요. 도시에 사는 소녀도 이쪽을 바라봅니다. 두 시선은 그림책을 읽는 독자에게 와닿습니다. 소년과 그림책을 읽는 나, 그리고 소녀가 책을 매개체로 서로 시선을 교환합니다. 그러고 보니 소녀도 소년도 그리고 이 그림책을 읽고 있는 ‘나’도 똑같은 빨강 책을 들고 있네요.

그런데 뭔가 두 아이가 꼭 닮아 보입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입고 있는 옷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지만 분위기며 생김이 꼭 닮아 보이는 두 아이. 어쩌면 둘은 서로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내 모습인 건 아닐까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나와 똑같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것 같다는 상상을.

빨강 책

소녀가 먼저 행동을 시작합니다. 하굣길 풍선 꾸러미를 산 소녀는 풍선을 타고 먼바다로 훨훨 날아갔어요. 그러는 중에 그만 빨강 책을 떨어뜨렸어요. 아래로 떨어진 빨강 책 속에서 여전히 소년이 책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녀가 풍선을 타고 떠나는 장면을 보다 소년은 그만 슬픔에 빠져버렸어요. 소녀가 떠났으니 아마도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소년은 빨강 책을 그만 덮어버렸어요.

빨강 책

하지만 이야기는 소녀가 떨어뜨린 빨강 책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소년이 사는 섬에 풍선을 타고 도착한 소녀. 그렇게 소녀와 소년 둘은 빨강 책 속에서 만났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사이였지만 빨강 책이 둘을 이어줬어요.

길에 떨어진 빨강 책은 또다시 누군가에게 발견되며 마무리됩니다. 거리에서 떨어진 빨강 책을 주워든 안경 쓴 소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와 눈이 마주칩니다. 빨강 책 하나로 우리는 소녀와 소년 마지막에 등장한 안경 쓴 소년과 비밀 하나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빨강 책은 환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열쇠입니다. 작가 바바라 리만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림책 속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그림책을 읽는 독자와 그림책 속 세상까지도 연결해 독특하고 신기한 환상 세계를 구현해 놓았어요.

한 소녀가 길 가 눈더미에서 발견한 빨강 책으로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책 “빨강 책”,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발견했으며 연결을 경험했느냐에 따라 인생의 반짝임 역시 다를 것입니다. 마음속 경계를 허물고 바라보면 보이는 세상, 그곳이 바로 환상의 세상입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다시 빨강 책
다시 빨강 책 – 끝없는 여행

(원제 : Red Again)
글/그림 바바라 리만 | 북극곰
(발행 : 2019/05/10)

2004년 출간된 “빨강 책”의 후속작으로 바바라 리만이 “다시 빨강 책”을 원서로 출간한 해가 2017년이니 전작과 후속작 사이 13년의 시간이 흘렀네요(한국판은 이번에 동시에 출간된 덕분에 국내 독자들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답니다).다시 빨강 책

이 이야기는 13년 전 소녀가 떨어뜨린 빨강 책을 주워갔던 자전거를 탄 소년으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섬 소년이 놓아둔 책은 바다로 흘러가 배를 탄 소년이 발견하게 되죠. 자전거를 탄 소년과 배를 탄 소년은 책 속에서 그렇게 연결됩니다.

다시 빨강 책

전작에서는 도시 소녀가 풍선을 타고 섬으로 소년을 찾아갔다면 이번에는 배를 탄 소년이 펠리컨을 이용해 자전거 소년을 찾아옵니다. 그러는 와중에 둘은 빨강 책을 놓쳐버립니다. 배를 탄 소년의 책은 해변가로 떠밀려가고 자전거 소년의 책은 지나가던 차 지붕 위로 떨어져 버렸어요.

다시 빨강 책

전체적 구성은 전작과 거의 흡사하지만 이 책은 마무리를 아주 독특하게 해놓았어요. 자전거 소년이 잃어버린 책이 자동차 지붕 위에 놓인 채 어딘가로 가다 길모퉁이에서 떨어집니다.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전작의 주인공 소녀입니다. 마치 이 이야기는 둥글게 이어져 빨강 책이 전작과 후속작을 돌고 도는 묘한 느낌이 들어요. 두 번째 책이 전작의 프리퀄 같은 느낌입니다. 제목과 발행일을 모른 채 두 권을 동시에 읽는다면 “다시 빨강 책”을 두 권의 연작 중 첫 번째 책이라고 생각할 독자들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아, 작가 바바라 리만의 장난 가득한 마무리에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어요.

똑같은 책 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아이들. 책은 읽는 이마다 다른 느낌 다른 해석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작가 바바라 리만은 에둘러 말한 것일까요? 어쩌면 삶은 이렇게 둥글게 이어지고 계속해서 누군가에게로 순환한다는 사실을 그림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Barbara Lehman의 홈페이지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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