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원제 : The Tiger Who Came To Tea)
글/그림 주디스 커 | 옮김 최정선 | 보림
(발행 : 2000/03/25)

※ 1968년 초판 출간


오랜 시간 사랑받는 고전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68년 출간된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발간된 지 5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사랑받는 그림책 중 한 권이죠.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지도 20년가량이 되었어요. 저희 집에 있는 그림책이 2001년 판이니 이 그림책과 함께 한 시간도 무려 18년이나 되었네요. 그럼에도 여전히 소피와 호랑이는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그림책을 읽어주던 저와 그 그림책을 좋아했던 아이만 변했습니다. ^^

어린 소피와 듬직해 보이는 호랑이. 둘이 나란히 식탁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눈 맞춤하고 있는 표지 그림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에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이 그림책의 원서 제목은 “The Tiger Who Came To Tea”로 ‘차 마시러 온 호랑이’입니다. 번역되면서 차는 간식으로 변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 느낌이 된 것 같아요.

소피가 엄마랑 간식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어요. 딩동! 하는 소리에 마치 소피처럼 그림책을 읽던 아이들은 궁금해집니다. 누굴까 누가 찾아왔을까 상상을 시작하죠. 우리 딸아이 역시 이 첫 장면을 참 좋아했어요. 딩동! 하는 부분을 읽어줄 때마다 누굴까? 기대하면서(이미 여러 번 읽어 다 알고 있음에도) 다음 장을 열곤 했어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문밖에 찾아온 이를 예측해 봅니다. 아침에 왔다 갔으니 우유 아저씨는 아니에요. 반찬 배달도 시키지 않았으니 반찬 가게 총각도 아니고 분명 아빠도 아닐 거예요. 열쇠를 챙겨 가셨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방법은 딱 하나!

“아무래도 문을 열어 봐야 알겠네.”

그러니 우리도 별 수 없죠. 문을 열어 봐야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음 장을 열어봅니다.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소피가 문을 열자 고개를 빼꼼 내밀며 호랑이가 인사를 합니다. 털이 북슬북슬하고 줄무늬가 죽죽 난 아주아주 커다란 호랑이의 깜짝 방문에 책을 보던 아이들이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저기요. 저는 지금 배가 아주 고프거든요.
들어가서 간식을 같이 먹어도 될까요?”

커다랗고 순둥순둥한 호랑이라니, 게다가 허락을 구하는 정중함까지 갖춘 호랑이라니요. 엄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랑이의 방문을 허락했어요. 다소곳하게 앉아 엄마와 소피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호랑이 모습은 또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지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커다란 덩치만큼 호랑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간식을 먹어치웁니다. 샌드위치를 접시째 몽땅 다 꿀꺽! 접시에 있던 빵도 몽땅 다 꿀꺽, 과자와 케이크, 우유에 홍차까지 몽땅 다 먹고도 호랑이는 여전히 배가 고픈지 부엌을 빙 둘러봅니다.

주황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호랑이와 푸른색 옷에 푸른 체크무늬 타이즈를 신고 있는 소피, 크기와 색깔 대비를 통해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특히나 여백의 미를 살린 하얀 바탕 위에 그린 그림이 호랑이와 소피의 모습을 더욱 강조해 보여주고 있어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호랑이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간식 수준을 넘어선…^^) 먹어치우고 있어도 전혀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아요. 부드럽고 상냥한 눈빛의 호랑이, 그리고 호랑이를 마냥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소피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기 때문인가 봐요. 마치 집에 같이 사는 고양이를 예뻐하는 아이처럼, 털이 복슬복슬한 인형을 다루듯 소피는 호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가진 것을 몽땅 다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수돗물까지 몽땅 다 마셔버린 호랑이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어요. 호랑이가 떠나자 곧 아빠가 돌아오셨어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호랑이가 와서 다 먹어치우는 바람에 집 안에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아빠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랬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아주 좋은 방법이 있거든.
먼저 코트를 입고 나서, 다 같이 식당에 가는 거야.”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 노란 달이 둥실 떠올랐어요. 환하게 불 밝힌 거리의 상점, 서둘러 귀가하는 사람들이 묘사된 풍경 속 행복해 보이는 소피네 가족, 뭔가 참 애틋하면서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오늘 호랑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밤거리 풍경, 호랑이 덕분에 소피네 가족은 오늘 따스한 추억 하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오늘 소피네 간식을 먹으러 왔던 호랑이를 꼭 닮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보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외식을 하러 가던 길에서 만난 작은 길고양이를 떠올린 소피의 상상은 아니었을까요? 배고파 보이는 길고양이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고 싶은 소피의 상상이 불러온 이야기, 그건 작가 주디스 커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예고 없이 찾아온 호랑이 때문에 집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지만 소피네 가족은 낙담하지 않아요. 먼저 코트를 입는 것, 그리고 식당에 가는 것.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존 버닝햄, 찰스 키핑,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주디스커, 2011년 88세의 나이에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를 펴내며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애잔하게 그려냈던 그녀는 2019년 5월 22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탈출했던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When Hitler Stole Pink Rabbit”이란 제목의 동화를 쓰기도 했어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를 읽고 있자면 고향을 떠나 낯선 땅 영국에 정착해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주디스 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불쑥 찾아간 어느 집에서 환영받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말없이 순둥순둥한 호랑이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집어 든 그림책을 찬찬히 감상하며 그녀의 마음을 오롯이 느껴봅니다.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1968년 출간한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속 엄마와 2011년 출간한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의 주인공 백발의 할머니. 할머니는 연두색 원피스 위에 보라색 카디건을 입고 있어요. 그 옛날 소피의 엄마가 입었던 연두색 원피스에 보라색 카디건과 같은 색깔의…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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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room
kooroom
2019/10/05 17:51

아 너무 좋아요. 연두색 원피스에 보라색 가디건이 동일할 줄이야. 눈물까지 찔끔했어요. 항상 좋은 책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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