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까짓 거!

이까짓 거!

글/그림 박현주 | 이야기꽃
(발행 : 2019/09/25)

2019 가온빛 추천 BEST 101 선정작


거센 비가 몰아치고 있는데 아이는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빗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까짓 거!”, 사뭇 비장해 보이는 아이 마음속 외침일까요? 그 말을 여러 번 되뇌어 봅니다. 이까짓 거, 이까짓 거… 만만찮은 세상살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꼭 필요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이까짓 거!

한 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요. 표정으로 보아 아이는 오늘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나 봅니다. 하굣길 아이들은 신이 나 우르르 복도를 뛰어갑니다. 삼삼오오 모여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학교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다른 아이를 데리러 왔던 어른들이 ‘마중 올 사람 없니? 같이 갈래?’ 하고 물었지만 아이는 선뜻 응하지 못했어요. 엄마가 오실 거라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아이 얼굴에는 어색함이 가득합니다.

비 내리는 저쪽보다 아이가 서있는 이쪽에 더 무거운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운동장 저쪽으로 사라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은 더없이 쓸쓸해 보입니다. 그때였어요.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준호가 나타난 건.

이까짓 거!

준호도 오늘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나 봐요. 그런데 준호는 다르게 행동했어요. 학교 현관 앞에서 마냥 미적거리던 아이와 달리 준호는 망설임 없이 비를 뚫고 나섰거든요. ‘넌 안 가냐?’하는 말과 함께. 얼떨결에 아이는 준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가방을 머리 위에 쓰고 최대한 빠르게. 탁탁탁탁탁탁탁… 두 아이가 빠르게 빗속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 두 아이만 색깔을 가지고 있어요. 한 아이는 분홍색 셔츠를, 앞서 달리는 준호는 경쾌한 노란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어요. 무심한 군중들 사이 우산 없이 달리는 두 아이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이까짓 거!

그렇게 학교 앞 문방구까지 달려갔어요. 잠시 숨 고르기를 마친 준호가 느닷없이 제안을 했어요.

“다음은 편의점까지, 경주할래?
지는 사람이 음료수 사 주기.”
돈이 없다고 말하려는데,
“준비, 땅!” 준호가 외쳤다.

학교에서 문방구로, 다시 문방구에서 편의점으로 내 달린 두 아이, 준호가 사준 음료수를 먹고 나자 아이는 뭔가 힘이 난 모양입니다. 이번엔 아이가 먼저 미미분식까지 달리자고 제안했거든요. 이전과는 달리 아이 얼굴에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비는 이제 아이에게 하나의 놀이가 된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는 빗속의 한 판 승부!

이까짓 거!

미미분식 찍고, 피아노 학원까지 다다랐을 때 준호는 뒤도 안돌아보고 피아노 학원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난 다 왔어. 잘 가’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아주 쿨하게 떠난 준호. 거리에는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어요. 여기까지 함께했던 준호는 이제 없어요. 길에는 우산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가고 밀려옵니다. 처음처럼 아이는 다시 혼자입니다.

회색 하늘, 회색 비, 무심히 오가는 수많은 우산들, 다시 회색빛 가득해진 거리.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힘껏 달리는 법을 배웠으니까.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제 알았으니까… 아이가 힘차게 달려갑니다.

이까짓 거!

이까짓 거!

“얘, 우산 없니? 같이 갈래?”
“괜찮아요!”

이번엔 정말이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아이의 대답이 달라졌어요. 이제 ‘이까짓 거!’ 하고 마음 다부지게 먹을 줄 알게 되었으니까요.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아이의 발걸음이 참으로 씩씩합니다.

이까짓 거!

회색빛 어두웠던 하늘이 어느덧 노란 빛깔로 물들어 있어요. 준호가 입었던 셔츠와 똑같은 노란 색깔로.

아이 뒤를 따라 또 다른 아이가 달리고 있습니다. 피아노 학원 입구에서 우산이 없어 미적 거리고 있던 한 아이, 저만치 뒤에서 아이를 따라 달려갑니다. 비는 점점 거세지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아주 의연해요. 온몸으로 비를 맞고도 씩씩한 아이, 오늘 한 뼘 넘게 아이는 성장합니다. 직접 부딪혀 보니 별거 아닌걸. 두 주먹 꼭 쥐고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리고 또 그 다음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갑니다. ‘이까짓 거!’ 하고 외쳐보면 세상 두려울 것 하나 없어요.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마법의 주문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는 너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외치고 싶은 말 “이까짓 거!”, 오늘 나의 작은 행동은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을까요? 작은 친절, 따스한 미소, 말 한마디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거나 힘이 되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두 주먹 꼭 쥐고 씩씩하게 앞서 내달리는 아이처럼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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