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지와 빵집 주인

샌지와 빵집 주인

(원제 : Sanji and The Baker)
로빈 자네스 | 그림 코키 폴 | 옮김 김중철 | 비룡소
(발행 : 2001/08/26)

※ 1993년 초판 출간


얼마 전 한 대학생에게 이런 메일을 받았어요. 맛있는 빵 냄새를 맡았다 아래층 빵집 주인에게 고소를 당하는 내용의 그림책을 어린 시절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혹시 이 그림책 제목을 알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어요. “샌지와 빵집 주인”이라고 알려주었더니 어찌나 고마워하던지요. 그림책과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되찾아 준 것 같아 제 마음이 더 흐뭇했습니다.^^

아래층 빵집에서 올라오는 빵 냄새를 맡았다는 이유로 위층 샌지를 고소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재판이 벌어진다는 내용의 “샌지와 빵집 주인”, 이 그림책을 읽고 나면 악독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이 떠오릅니다. 둘 중 누가 더 악독한지 비교할 수 있을까요?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과 간교한 빵집 주인 중에. 샌지와 빵집 주인

긴 여행 끝에 샌지가 도착한 곳은 전설의 도시 후라치아였어요. 그곳에 잠시 머물기로 결심한 샌지는 마음에 쏙 드는 집을 하나 구하게 됩니다. 샌지는 작고 아담했지만 아늑한 방이 있고 무엇보다 방 밑에 빵집이 있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샌지와 빵집 주인

아침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기가 막히게 좋은  빵 냄새에 샌지는 기분 좋게 일어납니다. 샌지는 베란다에 서서 맛있는 빵 냄새를 코로 훅훅 들이마시면서 아주 행복했어요. 그리곤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주 조그만 계피빵을 사면서 빵집 주인에게 베란다에서 맛있는 빵 냄새를 맡았다고 얘기했죠. 그런데 빵집 주인은 샌지의 말을 몹시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어요.

그렇게 여러 날이 흘러간 어느 날 빵집 주인이 샌지의 집을 찾아옵니다. 빵집 주인은 샌지가 자신의 빵 냄새를 훔쳤다며 도둑으로 몰아세웠어요.

샌지와 빵집 주인

결국 빵집 주인은 샌지에게 빵 냄새 값을 받겠다며 샌지를 고소했고 둘은 재판소에 가게 됩니다. 빵집 주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재판관이 샌지에게 말했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은닢 다섯 냥을 들고 다시 재판소로 오라고.

재판관의 말에 샌지는 잔뜩 풀이 죽었어요. 그 옆에서 빵집 주인은 두 손을 비비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보나 마나 이 재판은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샌지와 빵집 주인

은닢 다섯 냥이 없었던 샌지는 결국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관은 샌지 앞에 커다란 놋쇠 그릇을 놓고 거기에 한 번에 한 닢씩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요. 그리곤 옆에 있던 빵집 주인에게 잘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샌지와 빵집 주인

짤랑 딸랑 딸그락 땡그랑 떨그덕 소리를 내며 동전이 놋그릇 위에 떨어지자 재판관은 빵집 주인에게 동전 소리를 들었는지 물었어요. 분명하게 들었다는 빵집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됐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이 네가 받은 값이니라.”

“그리고 샌지, 너는 이 은닢 다섯 냥을 도로 가져가거라.”

멍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있는 빵집 주인, 그의 욕심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꼿꼿하게 섰던 모자도 푹 주저앉았네요. 그와 달리 재판관 앞에서 시종일관 풀 죽어있던 샌지는 목젖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기쁘게 소리치고 있어요.

‘빵 냄새의 적절한 값’은 ‘은닢 다섯 냥이 내는 소리’라는 세기의 명판결을 내린 재판관, 그림책을 다 보고 난 후 가슴 깊은 곳까지 후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는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답답하게 바라보며 살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커다란 권력이나 가진 돈과 상관 없이 상식이 지켜지기를, 법 앞에 모두가 공평하고 공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빈 자네스의 혼을 쏘옥 뺄 만큼 재미있는 스토리와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코키 폴의 그림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있어 마치 한 작가가 그리고 쓴 것처럼 느껴지는 그림책 “샌지와 빵집 주인”, 다시 보아도 여전히 즐겁습니다. 오래 보아도 신선합니다.


※ 그림책 속 그림, 자세히 한 번 살펴볼까요? 샌지에게 은닢 다섯 냥을 흔쾌히 빌려주었던 친구들, 그들의 정체를 찾아보았습니다.

샌지와 빵집 주인

처음 샌지에게 은닢 한 냥을 빌려준 친구는 “샌지와 빵집 주인”을 그린 작가 코키 폴이에요. “마녀 위니” 시리즈로 더 잘 알려진 작가 코키 폴, 장난기 가득한 그림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을 스리슬쩍 그려 넣곤 한답니다.

샌지와 빵집 주인

두 번째 은닢을 빌려준 이는 이 그림책의 글을 쓴 로빈 자네스예요. 타자기 앞에서 글을 쓰고 있던 로빈 자네스, 환한 미소가 실제 모습과 많이 닮았죠?

샌지와 빵집 주인

세 번째 은닢을 빌려준 이는 이 그림책의 편집자인 론 히피(Ron Heapy)입니다. 코키 폴은 1986년 옥스퍼드 출판사 편집자였던 론 히피를 만나 마녀 위니의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편집자답게 그의 주변이 책과 원고들로 가득하네요.

샌지와 빵집 주인

네 번째 은닢을 빌려준 친구는 마녀 위니였어요. “샌지와 빵집 주인”에 마녀 위니가 등장하고 “마녀 위니와 아기 용”에는 샌지가 카메오로 슬쩍 등장해요. 코키 폴 작품들을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보면 이렇게 친근한 인물들이 그림책 곳곳에 등장한답니다.

샌지와 빵집 주인

다섯 번째 은닢을 빌려준 이는 Professor Puffendorf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입니다. 이 시리즈 역시 로빈 자네스와 코키 폴이 함께 쓴 작품이랍니다.

샌지와 빵집 주인

재판을 마친 샌지가 밖으로 나왔을 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친구들 사이 수상한 이, 혹시 찾으셨나요? 맨 끝에 서있는 해적은 샌지에게 돈을 빌려준 적 없는 인물인데 아주 자연스럽게 빌려준 척하고 손을 내밀고 있죠. 아이들은 이 장면을 아주 좋아해요. ‘어, 얘는 돈 빌려준 적 없는데…’하면서요. 재치 가득한 코키 폴의 마지막 웃음 포인트가 되는 장면이랍니다. 이 해적은 코키폴의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인 Captain Teachum이랍니다.

이렇게 다섯 명의 인물들은 재판정에도 샌지와 함께 있었어요.

샌지와 빵집 주인

판결이 내려졌을 때 샌지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코키 폴은 슬쩍 뒤돌아 독자들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어요. 프로답게 재판정에도 그림 그릴 도구를 들고 왔네요. 로빈 자네스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샌지와 함께 기뻐하고 있고 편집자 론 히피(Ron Heapy)는 마녀 위니와 친근하게 속삭이고 있네요. 그리고 저 위쪽을 보면 마녀 위니의 고양이인 윌버도 등장하고 있답니다. ^^

날카로운 펜으로 그린 섬세하면서도 세밀한 그림, 대담한 색감, 생생한 표정의 주인공들, 그림 곳곳에 유머러스한 요소들을 여기저기 숨겨놓는 작가 코키 폴, 그의 매력이 한가득 녹아있는 그림책 “샌지와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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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옥수수
2019/11/22 12:01

읽었는데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알아가네요! 신기해요. 감사합니닿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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