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너야

다음엔 너야

(원제 : Fünfter Sein)
에른스트 얀들 | 그림 노르만 융에 | 옮김 박상순 | 비룡소
(발행 : 2001/05/23)


어디 한 군데씩 불편해 보이는 장난감 친구들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어디일까? 무얼 하려는 거지? 궁금증이 일지만 우린 이미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어요. 아파 보이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묘하게 싸늘해 보이는 분위기를 보면서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요.

“다음엔 너야”는 전통적 시 형식과 내용에 반대해 생겨난 실험 문학의 하나인 구체시(concrete poetry)의 대가 에른스트 얀들이 쓴 시 ‘Fünfter Sein'(다섯 번째)에 노르만 융에의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완성한 그림책입니다.

다음엔 너야

어두컴컴한 대기실에서 고장 난 장난감 인형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모습이 유난히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건 왜일까요? 푸른색에 둘러싸여 스산하고 차가워 보이는 대기실엔 흔한 그림 한 점, 작은 꽃병조차 없어요. 각진 모서리가 강조되어 보이는 천장과 벽, 아픈 인형들은 푹신한 의자가 아닌 딱딱한 나무 의자 위에 앉아있습니다. 병원 소독약 냄새가 훅 느껴지는 순간 아픔보다 더 강하게 공포가 밀려왔던 어린 날의 서늘한 기억이 이 곳에서 느껴집니다.

다음엔 너야

문이 열리고
하나가 나왔어.

무당벌레 인형이 나온 문에서 따스한 노란 불빛이 비쳐 나옵니다. 푸른색 대기실은 안락한 노란빛이 합쳐져 초록색으로 변하며 잠시 전보다 온화한 분위기를 풍겨요. 어두컴컴한 대기실을 비추던 작은 전등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고 차례가 다가온 장난감 인형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곧이어 열린 문 안쪽으로 다친 장난감 인형 하나가 덤덤하게 들어갑니다.

다음엔 너야

하나가 들어가고

다음엔 너야

넷이 남았지.

‘문이 열리고 하나가 나왔어 / 하나가 들어가고 / O이 남았지’. 하나 들어가고 하나 나오기를 반복하며 똑같은 구조의 문장이 반복됩니다. 들고 나는 친구들만 바뀔 뿐 장면 역시 똑같이 반복되죠. 네모난 문이 열리고 노란 불빛이 대기실을 비추고 늘어졌던 전등이 요동을 치고 다른 친구가 들어갈 때마다 마치 신호등처럼 전등 불빛이 치료실로 들어가는 친구를 비추고. 자신의 차례가 다가와 잔뜩 긴장했던 친구들은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치료실을 나와요. 그러니 무섭고 두려워도 이 자리에서 꿋꿋이 버틸 수밖에…

다음엔 너야

마지막 하나가 들어가면
다음엔 너야.

처음엔 빙그레 웃던 피노키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해요. 그러다 자신의 차례 앞에서 눈물 찔끔,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마음 속에서도 눈물 한 방울 찔끔 나옵니다. ‘다음엔 너야’란 문장이 유독 와닿습니다.

다음엔 너야

자, 이제 내 차례입니다. 열린 문을 향해 코가 부러진 피노키오가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지금까지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시점이 마지막 장면에서 피노키오를 따라갑니다. 마치 내가 이제껏 기다렸던 피노키오인 것 마냥.

환하게 열린 치료실 문, 그리고 그 안쪽에 둥글둥글하게 생긴 의사 선생님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어요. 뾰족하고 각지고 딱딱했던 대기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그 뒤로 피노키오를 치료해줄 빨간 코가 보입니다. 긴 기다림 끝에 갖게 되는 희망이며 안도감입니다.

절제된 문장과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 속에 희망과 안도의 메시지를 건네는 그림책 “다음엔 너야”, 어쩌면 우리 인생 역시 이런 과정의 연속 아닐까 싶습니다.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건너는 긴 여정, 하지만 희망이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는 긴 여정을 묵묵히 수행해 갈 수 있죠. 그래, 문 하나 열리고 또 열리면 결국 내 차례가 돌아올 거야. 기다려 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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