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원제 : The Sweetest Fig)
글/그림 크리스 반 알스버그 | 옮김 이지유 | 미래M&B
(발행 : 2003/06/30)

※ 1993년 초판 출간


세밀하면서도 정밀한 묘사, 몽환적인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판타지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일까요?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그림책들은 왠지 쨍한 날보다는 으스스한 계절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치과 의사 비보 씨는 아주 까탈스러운 사람이에요. 모든 것이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만 했어요. 집에서 기르는 개 마르셀이 가구에 올라가거나 짖는 것, 마르셀의 털이 자신의 옷에 묻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무화과를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입에 넣으려는 비보 씨의 모습에서도 그의 성마른 성격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어느 날 이른 아침, 이가 몹시 아픈 할머니가 비보 씨의 병원을 찾아왔어요. 이를 뽑은 할머니는 비보 씨에게 치료비 대신 무화과 두 개를 내밀었어요.

“이 무화과는 아주 특별하다우. 선생이 꾼 꿈이 진짜로 일어나게 될 거요.”

할머니가 미쳤다고 생각한 비보 씨는 화가 나서 약도 주지 않고 할머니를 그대로 내쫓아 버렸어요.

이를 뽑는 비보 씨의 모습은 마치 고문을 하고 있는 모습 같아요. 게다가 고통받는 환자를 앞에 두고 싱긋 웃는 모습이라니… 고통받는 환자의 마음 따위는 그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비보 씨는 무화과를 밤참으로 먹었어요. 치료비를 대신해 할머니가 건넨 무화과는 아주아주 맛있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가장 달고 맛있는 무화과였답니다.

식탁 아래에서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마르셀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요. 고급 레스토랑에라도 온 듯 반듯하게 앉아 우아하게 무화과를 자르는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다음 날 아침 산책을 나간 비보 씨는 찻집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유리창에 비친 비보 씨는 속옷만 입고 있었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밤 꾼 꿈이 생각났어요. 속옷만 입은 채 찻집 앞에 서있던 황당한 꿈과 함께 에펠탑이 고무처럼 축 늘어져 버렸던 비현실적인 꿈. 비보 씨의 지난밤 꿈은 지금 비보 씨 눈앞에서 현실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할머니가 말한 대로 무화과를 먹고 잠든 날 밤 꾼 꿈의 내용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 비보씨는 남은 무화과 한 개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비보 씨는 원하는 대로 꿈을 꾸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고 잠들기 전 자신에게 이렇게 최면을 걸었어요.

“비보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다.
비보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다!”

비정하고 냉소적인 비보 씨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납니다. 사뭇 비장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비보 씨는 날마다 같은 꿈을 꾸게 되자 아껴 두었던 두 번째 무화과를 꺼내들었어요.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던 비보 씨는 마르셀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어요. 부자가 되면 당장 저 볼품없는 개 대신 멋진 사냥개와 산책 나갈 거라 결심하면서…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마르셀 역시 비보 씨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꿈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마법의 무화과, 하지만 정작 마지막 무화과를 먹은 건 비보 씨가 아니라 그가 키우던 강아지 마르셀이었어요. 그가 잠시 등을 돌린 순간 마르셀이 식탁 위로 뛰어올라 무화과를 날름 먹어 치웠거든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비보 씨를 피해 마르셀이 침대 밑으로 숨어버리자 비보 씨는 마르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어요.

“내일,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하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치료비 대신 받고는 화가 나서 내동댕이쳤던 무화과, 그 무화과가 마법의 무화과임을 알고 자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도록 악착같이 수련했지만 부자가 되면 가장 먼저 버리려 했던 개에게 하나 남은 무화과를 허무하게 빼앗겨 버린다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대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이 그림책에서도 결말을 아주 신선하게 비틀어 버리거든요..

날이 밝아오자 잠에서 깬 비보 씨,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비보 씨가 깨어난 곳은 침대 위가 아닌 침대 밑이었어요. 그때 낯익은 얼굴이 불쑥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제 산책 나갈 시간이다. 이리 온, 마르셀.”

비보 씨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에서는 개 짖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환상과 현실이 재미있게 뒤섞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욕심부리지 마라, 친절해라 등의 교훈도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약한 자들의 반란은 언제나 신선함과 함께 즐거움을 안겨 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좌)압둘 가사지의 정원에 나오는 프리츠 / (우)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에 나오는 마르셀

1980년 발간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첫 번째 그림책인 “압둘 가사지의 정원”과 1993년 발간된 이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기묘한 마법을 소재로 했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조연이긴 하지만 하얀 개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마술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프리츠와 주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만들어 버린 마르셀, 둘 다 우리들을 마법의 세계로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가끔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꿈이고 꿈속에서 만나는 세상이 현실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해본 적 있지 않나요?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그 둘이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를 끌어오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의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는 자칫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판타지 세상을 묘하게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꿈이 진짜로 꼭 이루어졌으면…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물하는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꿈은 이루어집니다. ^^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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