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너머

울타리 너머

(원제 : Beyond The Fence)
글/그림 마리아 굴레메토바 | 옮김 이순영 | 북극곰
(발행 : 2019/09/28)

★ 2019 가온빛 추천 BEST 101 선정작
※ 2019년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최종후보작


울타리 너머 머나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꼬마 돼지의 뒷모습이 측은해 보이는 건 주변 분위기 때문일까요? 먹구름 가득한 하늘, 아득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홀로 서있는 꼬마 돼지, …

또 한 장을 넘기면 언덕 위에 혼자 앉아있는 꼬마 돼지가 등장해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궁금해하며 또 한 장을 넘기면 근사한 대저택이 등장합니다. 사방으로 창이 나있지만 모두 굳건하게 닫혀있어요. 침묵에 빠진 것처럼요. 예의 그 꼬마 돼지는 속표지에 다시 등장해요. 다소곳한 모습으로 찻주전자를 들고 가는 모습으로.

울타리 너머

안다는 말이 많았어요. 소소는 듣기만 했지요.

안다는 소년, 소소는 표지 그림의 꼬마 돼지입니다. 얼핏 보면 안다와 소소는 친구 사이처럼 보여요.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안다, 친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소소.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 있어요. 소소는 듣기만 했다는 사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소소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입니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돼지라뇨.

울타리 너머

안다는 소소한테 어울리는 옷이 뭔지 알았어요.
뭘 하고 놀면 좋을지도 알았고요.

안다는 뭐든 잘 알았어요.

글이 설명하는 안다는 참 친절하고 좋은 아이 같아 보여요. 소소에게 어울리는 옷이 뭔지도 잘 알고 있고 뭘 하고 놀면 좋을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림은 좀 달라요. 안다가 권하는 옷을 바라보는 소소의 눈빛은 슬퍼 보이고 둘이 함께 노는 모습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거든요. 소소를 대하는 안다의 모든 행동은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보여요.

울타리 너머

소소가 산들이를 만난 건 안다가 놀러 온 사촌과 놀이에 빠져있던 날이었어요. 안다와 함께 있을 때 사람처럼 두 발로 걷던 소소는 혼자 남게 되자 여느 돼지들처럼 네 발로 걸어 산책을 나섭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편했던 것처럼요. 옷을 입은 소소를 본 산들이가 물었어요.

“숲에서 달릴 때 불편하지 않니?”
“아니, 난 달리지 않거든.”
“세상에! 달리면 얼마나 신나는데! 한번 해 봐.
같이 달릴래?”

한 번도 달려 본 적 없기에 달리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알지 못하는 소소. 하지만 소소는 산들이와 함께 달려볼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그러고 싶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산들이와 소소는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집니다.

울타리 너머

넓고 푸른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들이를 만난 후 소소는 좀 달라졌어요. 울타리 너머 어딘가를 신나게 달리고 있을 산들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죠. 하지만 막상 산들이가 다시 찾아오자 소소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숲에서 같이 달리자는 산들이의 제안에 소소는 자신은 울타리 너머로는 갈 수 없다고 말했어요.

울타리 안쪽에 갇힌 것은 소소의 몸만이 아니에요. 소소의 마음 역시 함께 갇혀있어요.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 너울대는 마음 한쪽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과 의심은 스스로 커다란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쪽에 소소 자신을 잡아 가두고 있어요. 어두컴컴한 감옥 같은 실내에서 작은 창을 통해 창밖을 바라보는 소소의 모습이 바로  지금 소소의 마음 같습니다.

울타리 너머

사촌이 돌아가자 안다는 다시 소소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함께 있을 뿐 안다는 소소의 마음 따위 관심이 없어요. 소소를 향한 안다의 일방적인 강요와 통제만 있을 뿐. 잠들기 전 소소는 산들이를 생각합니다.

다음 날에도 소소는 안다와 함께 있어요. 왕의 옷을 입은 안다 앞에 어릿광대 옷차림을 하고 자리에 앉으려던 소소는 그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소소는 불편한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듯 스스로를 옥죄고 있던 어색한 어릿광대 옷을 벗어던졌어요. 그리곤 네 발로 뛰어 정원을 나섭니다. 아주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안다가 갑자기 사라진 소소를 찾아 나섰을 때…

울타리 너머

소소는 이미 울타리 너머로 달리고 있었어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 속에서 일방적 강요와 통제를 받으며 그것이 행복이고 사랑이라 믿고 살았던 소소가 드디어 용기를 냈어요. 울타리 너머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일방적인 관계에 싫증이 나버렸지만 스스로 그런 관계를 끝맺지 못하고 여전히 안다에게 끌려다니는 소소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안겨 줍니다. 그림책 속 안다와 소소는 어쩌면 친구 혹은 부부, 형제자매, 연인, 동료 관계 놓여있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몰라요. 이리저리 얽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울타리 너머”는 그런 관계와 그런 관계 속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림책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