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함께 있을게

내가 함께 있을게

(원제 : Ente, Tod Und Tulpe)
글/그림 볼프 에를브루흐 | 옮김 김경연 | 웅진주니어
(발행 : 2007/10/31)


살아있다는 건 무얼까요?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밝고 환한 아침을 맞이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마주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싫어하는 것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릴 수 있는 것, 기쁜 일 앞에서 큰 소리로 웃고 슬픔에 빠져 흐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일까요? 죽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무엇인가요?

“내가 함께 있을게”는 삶과 죽음을 다룬 철학 그림책이에요. 아이러니하지만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존재합니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작가 볼프 에를브루흐는 이 그림책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무겁고 길게 써서 스스로 읽기에도 지칠 정도라 생각했던 초고를 십 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정리해서 간결함 속에 깊은 여운이 가득한 그림책으로 완성해냈어요.

내가 함께 있을게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리, 뭔가 이상한 모양입니다. 등 뒤에 있는 어떤 존재를 느낀 듯 불현듯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이내 종종걸음을 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리는 드디어 그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보게 됩니다. 오리가 누군데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냐고 묻자 그것이 이렇게 말했어요.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검붉은 튤립을 뒤에 감추고 오리를 찾아온 죽음, 퀭한 검은 눈을 한 해골 모습의 죽음은 자신의 존재를 들켰음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덤덤하게 자신을 ‘죽음’이라고 소개합니다. 놀란 오리가 ‘그럼 지금 나를 데리러 온 거냐’고 묻자 죽음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와 말합니다.

“그동안 죽 나는 네 곁에 있었어. 만일을 대비해서.”

죽음이 이야기하는 ‘만일’은 독감에 걸린다거나 사고가 나는 것 같은 거예요. 살아있는 것에게 그런 사고가 날까 걱정해 주는 건 삶의 몫이고 죽음은 그런 ‘만일을 대비’해 곁에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을 대비해 곁에 있다는 죽음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리는 친절하게 미소 짓는 죽음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죽음만 아니라면 괜찮은 친구라고, 그것도 꽤 괜찮은 친구라고.

내가 함께 있을게

죽음을 데리고 오리는 연못에 갔어요. 죽음 곁에서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천진난만하게 자맥질을 즐기는 오리와 달리 죽음은 자맥질도 축축한 연못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축축하고 어둡고 어떤 두려움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죽음에게도 겁나는 것이 있다니, 몹시 묘하게 느껴집니다. 연못에서 나온 오리는 추워하는 죽음을 꼬옥 안아주었어요. 친한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죽음의 표정이 오묘해요. 이제껏 아무도 죽음을 이렇게 대해 준 적이 없었거든요.

죽음을 안고 있는 오리의 모습은 참 많은 생각을 남겨줍니다. 살아있는 오리가 죽음을 따뜻하게 안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 삶에 죽음이 함께 스며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죽음을 곁에 둔 오리에게 삶은 기쁨이고 감사함입니다. 아침에 죽음보다 일찍 눈을 뜬 오리는 기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나, 아직 죽지 않았구나!’

죽음이 곁에 없었던 어제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아침입니다. 다시 맞이한 아침이 새삼 경이롭고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기쁨입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

처음의 긴장은 풀어지고 함께 놀고 함께 지내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오리와 죽음, 어느 날 둘은 나무 위로 올라가 연못을 보게 되었어요. 고요하고 쓸쓸한 연못을 바라보던 오리는 문득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생각했어요.

‘내가 죽으면 저렇겠구나. 연못 혼자 외로이. 나도 없이.’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져.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연못은 그대로지만 오리가 죽으면 오리만의 연못은 사라지는 것. 죽음은 그런 것인가 봐요.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은 나와 같이 의미를 지닙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려요. 살아가는 동안 찬란한 그것들 역시 내가 없는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나의 세상 속에서 매 순간 행복하고 기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물론 죽음이라고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아요. 죽음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깃털 속을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을 느낀 오리는 죽음에게 말했어요.

“추워. 나를 좀 따뜻하게 해 줄래?”

오래 전 오리가 연못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죽음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것처럼. 부드러운 눈이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리는 날, 숨을 쉬지 않고 조용히 누워있는 오리를 죽음이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죽음은 커다란 강으로 오리를 안고가 물 위에 띄우고 살짝 밀었어요. 죽음이 놓아준 검붉은 튤립을 안고 오리가 강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

죽음은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삶을 누리던 친구를 죽음으로 인도하며 슬픔을 느낀 죽음, 하지만 그것이 삶이라는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어 봅니다. 오리를 떠나보낸 죽음이 다시 길을 걷습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죽음 주위를 여우가 토끼가 쫓고 쫓으며 뱅글뱅글 돌고 있어요. 사력을 다해 달리는 토끼, 토끼를 바라보는 여우의 날카로운 눈빛. 삶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나 이렇게 ‘만일을 대비해’ 삶과 함께하고 있나 봅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
“Ente, Tod Und Tulpe”, 튤립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스며있어요.

번역판 제목은 다소 심오하지만 독일어 원서 제목은 그림책에 등장하는 것들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어요. “Ente, Tod Und Tulpe”에서 ‘Ente’는 오리, ‘Tod’는 죽음 ‘Tulpe’는 튤립을 뜻해요. 튤립은 해골 모습의 죽음이 처음 나타날 때 들고 있던 검붉은 꽃입니다. 마지막 오리가 죽자 죽음이 오리 가슴에 놓아주었던 꽃이 튤립이었죠. 살아있는 동안 오리는 한 번도 죽음이 들고 있던 튤립을 보지 못해요. 튤립은 죽음의 손안에서 조금씩 시들어 가다 죽은 오리를 들고 갈 때 오리처럼 축 늘어져 있어요. 튤립이 시들어 가는 것처럼 삶에 서서히 죽음이 스며들지만 오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갑니다. 튤립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스며있어요.

작가 볼프 에를브루흐는 하얀 여백을 살린 배경 위에 등장인물을 최대한 단순한 모양으로 핵심만 살려 그린 후 오려 붙인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했어요. 단순화 시킨 표현 위에 죽음이라는 무겁고 심오한 이야기는 독자의 부담감을 줄여줍니다. 하얗게 비워진 여백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며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의 그림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그림책들 중에는 이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처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심오한 철학 그림책들이 많이 있어요. 볼프 에를브루흐는 2006년 안데르센상, 2017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 등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 사과나무 위의 죽음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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