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팡도르

할머니의 팡도르

(원제 : I Pani D’oro Della Vecchina)
안나마리아 고치 | 그림 비올레타 로피즈 | 옮김 정원정, 박서영 | 오후의소묘
(발행 : 2019/12/2)


콩고물 밥? 콩가루 밥? 어릴 적 밥 잘 안 먹는 저에게 할머니는 틈만 나면 한 입 크기로 만든 작은 주먹밥에 노란 콩가루를 묻혀 먹이셨어요. 한 입 먹으면 숨이 턱턱 막혀… 그만 먹고 싶다고 징징대던 콩고물 밥 덕분에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선 ‘안 먹어!’부터 선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도 가끔 웃곤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이 그림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오래전 할머니의 콩고물 밥이 떠오른 건 왜일까요? 음식이란 게 잊혀졌던 기억을 소환하고 그 기억으로 마음이 따뜻해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콩고물 밥은 진저리 치게 싫어했지만 그 시절 그걸 만들어 주신 할머니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겠죠.

삶이란 일상의 모든 것을 충분히 사랑하고 그대로를 온전히 느끼는 것, 후회 없이 미련 없이. “할머니의 팡도르”를 읽었을 때 느꼈던 제 마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과 행복으로 물드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숨어든 삶과 죽음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의 팡도르

외딴 집에 한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어요. 고단한 하루를 보낸 할머니는 저녁 무렵 창가에 앉아 해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어요. 나이를 잊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던 할머니는 무심히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어요.

“죽음이 나를 잊은 게야.”

그러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즈음 죽음의 사신이 불쑥 할머니를 찾아왔어요. 할머니가 어디에도 기록된 적 없는 할머니만의 특별한 비법으로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고 있을 때였죠.

“나랑 갑시다.”

죽음의 사신이 팔을 뻗자 할머니는 들고 있던 나무 주걱을 사신의 입속에 쑥 밀어 넣었어요. 부드럽고 달콤한 반죽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가자 사신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어요.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한 맛. 곧바로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사신은 할머니가 만든 소에 들어있던 건포도 조각에서 느껴지는 가을 날 포도밭 정취, 쏟아지는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 달콤하게 익어가는 포도 향기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이제껏 누구도 기다려 준 적 없었던 사신은 처음으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어요(우리 옛이야기 팥죽할멈과 호랑이가 떠오르네요. 팥죽 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약속했던 호랑이도 지금 죽음의 사신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할머니의 팡도르

할머니를 찾아간 사신은 다정다감하고 솜씨 좋은 할머니 앞에서 천사처럼 고분고분 해지고 얌전해집니다. 할머니가 내어 준 온갖 풍미 가득한 빵은 바로 죽음이 아닌 삶의 맛이었어요. 할머니의 정성 가득한 디저트를 맛본 사신 가슴 한복판에서 뜨거운 심장이 쿵덕쿵덕 뛰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이 커다란 검은 자루 같은 모습으로 할머니를 처음 찾아왔을 때의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이미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할머니의 디저트에 푹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어리숙하고 친근한 느낌만 남았어요.

이렇게 죽음의 사신은 번번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할머니가 말하는 음식들이 자꾸만 궁금해져 다음을 또 다음을 기약했기 때문이죠. 할머니를 데리러 가는 길, 사신의 마음은 오늘 수행해야 할 임무보다 할머니가 만든 요리 생각뿐이었어요. 사신답지 않게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처음으로 기쁨과 설렘의 감정을 느꼈어요.

할머니의 팡도르

“어서 와요. 오늘은 그 시커먼 망토 좀 벗읍시다.
대신 이걸 입어요. 안 그랬다간 아이들이 놀랄 테니.”

할머니의 제안대로 죽음의 사신은 검은 망토를 벗고 색색의 숄을 걸치고 할머니의 가족들과 어울려 한껏 삶의 향기에 흠뻑 취해봅니다. 삶을 삼키러 온 죽음이 흠뻑 취해버린 달콤하고 향기롭고 따뜻하고 친절한 삶의 향기라니…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어요. 그날도 할머니를 찾아간 사신은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할머니가 오래도록 정성 들여 만든 황홀한 금빛 팡도르를 맛보았죠. 할머니가 건넨 따뜻한 핫초코를 맛본 사신은 더 이상 자신이 없었어요. 무슨 수로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할머니의 팡도르

사신의 슬픈 마음을 먼저 알아차린 건 할머니였어요. 앞치마를 풀며 할머니가 말했어요.

“이제 갑시다.”
“찰다 속에 레시피를 숨겨 두었으니
이제 비밀은 아이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거예요.
이제 갈 시간이야.”

‘나랑 갑시다.’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찾아왔던 죽음의 사신, ‘이제 갑시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죽음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사방에 흩뿌려진 팡도르는 할머니가 세상에 남긴 사랑과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어요. 죽음에게 사랑과 행복 그리고 삶의 기쁨을 가르쳐 주고 솜사탕처럼 가볍게…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베파나(Befana) 전설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듣고 선물을 주러 동방 박사와 함께 길을 나섰다 길을 잃어버린 베파나는 할 수 없이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대요. 그 아이들 중에 아기 예수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탈리아에는 성 니콜라스 축일인 1월 6일 아이들이 베파나 할머니에게 선물을 받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안나마리아 고치의 글도 좋지만 비올레타 로피즈의 그림 역시 참 아름답습니다. 죽음의 사신과 겨울나무를 표현한 검은색, 뜨겁고 강렬하고 열정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는 할머니와 팡도르의 빨간색, 그리고 이들의 함께 머무는 세상을 표현한 하얀색, 이렇게 단순한 세 가지 색상만으로 비올레타 로피즈는 오묘하고 복잡한 삶과 죽음 이야기를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죽음의 입속으로 들어간 할머니가 먼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꼭 찾아보세요. 어둡고 축축하고 외롭고 두려운 길이라 느껴졌던 그 길을 어쩌면 이렇게 명료하게 표현했을까,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죽음은 차원이 다른 곳으로의 또 다른 여행이 아닐까? 볼 때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탄합니다.

“할머니의 팡도르”가 전하는 삶의 달콤함과 따뜻함, 간절함을 느껴 보세요. 삶의 향기에 흠뻑 젖은 죽음을 바라보며 오늘 나의 존재 이유를 느껴보세요. 여러 날 정성스럽게 준비한 할머니의 다양한 디저트처럼 삶은 다채롭고 뜨겁고 반짝거리고 황홀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그림책

이 선주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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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삐맘
하삐맘
2020/12/14 21:59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전 아빠가 해주시던…콩가루에 비빈 그 밥을 좋아해서 아이들에게도 해줬는데..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던기억이ㅋㅋㅋ 아마도 설탕이 덜 들어가서가 아닐까요?ㅎㅎ
좋은 그림책 소개와 함께 옛 추억을 소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애
정신애
2020/12/29 13:19

잘 지내시죠? 태백에 정신애 센터장입니다. 가온빛에 들려 선생님의 책소개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할머니의 팡도르………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대담함,인정, 받아드림등등이 더 마음에 와 닿네요. 늘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갑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21년 새해 다시한번 모실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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