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원제 : When you look up)
글/그림 기예르모 데쿠르헤즈 | 옮김 윤지원 | 지양어린이
(발행 : 2020/10/27)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은 184쪽이나 되는 장편 그림책입니다. 두께 때문에 망설였던 사람도 일단 책을 펼치기만 하면 마지막 장까지 손을 뗄 수 없을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독특한 그림들로 보는 재미가 넘치는 멋진 그림책입니다.

지난 가을 이 책을 읽은 뒤에 연말에 소개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눈 오는 밤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었고, 바삐 사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저녁 먹을 때 넌지시 건네주기 딱 좋은 선물이겠다 싶어서 말이죠.

정들었던 친구들을 떠나 외딴 시골 마을로 이사 온 한 소년과 오랜 세월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가던 한 노인의 기묘한 만남을 독특한 이야기 구성으로 담아낸 그림책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로렌조와 엄마. 한가로운 전원 생활에 설레는 엄마와 달리 와이파이는 되는 건지 걱정부터 앞서는 로렌조입니다. 아직은 낯선 곳에서의 시작이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아이는 아직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아 텅 빈 집 안을 둘러봅니다.

그러다 발견한 처음 보는 신기한 모양의 커다란 가구 하나. 마치 피아노처럼 생긴 가구의 덮개를 열어보니 다양한 크기의 서랍들로 가득한 아주 오래된 책상이었습니다. 서랍들마다 죄다 열어보지만 텅 비었을 뿐 로렌조의 흥미를 끌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어요.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그러다 책상 아래쪽에서 비밀의 문을 찾아낸 로렌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문을 열자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노트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창가에 기대 앉은 로렌조는 겉표지만 한참을 들여다보다 마침내 노트를 펼쳐봅니다.

그 안에는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청동 드래곤, 장화와 모자, 공장, 꿈의 여행자… 제목도 특이한 이야기들이 색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그림들과 함께 들어 있었죠.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로렌조는 새로운 집 새로운 마을에 하루하루 적응해 가며 혼자만의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씩 그 이야기들을 읽어갑니다.

처음엔 그저 상상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로렌조의 집이나 마을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런 연결 고리들을 발견할 때마다 로렌조는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경험과 삶을 기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동 드래곤>에서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가 갑자기 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버린 전등은 계단 위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와 닮았습니다. 엄마 심부름 다녀오던 길에서는 <장화와 모자>에서 기린 아가씨에게 달겨들었던 조그만 강아지를 발견하고 쫓아갔다가 엄청나게 큰 애꾸눈 개 휴고를 만납니다. <공장>을 읽고는 틀림 없이 이 마을 어딘가에 그 공장이 있을거라며 엄마 몰래 빠져 나와 휴고와 함께 떠난 한밤의 탐험에서는 오래전에 마을에 있던 공장에서 아주 큰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내죠.

그렇게 로렌조는 노트 속에 담긴 이야기들과 현실을 오가며 자기 자신도 모른 채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들 속에 담긴 의미와 비밀을 풀기 위해 마을 구석 구석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그렇게 찾아낸 단서들과 자신만의 해석을 새 노트에 로렌조 자신의 이야기로 새로 써보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엄마를 따라서 마을 양로원에 가게 된 로렌조는 놀라운 단서 하나를 찾게 됩니다. 엄마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노트에 담긴 마지막 이야기 <꿈의 여행자>를 읽고 있다가 양로원 직원들끼리 나누는 말을 듣게 됩니다.

👵 :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종이만 자르고 있어.
👱‍♀️ : 누가요?
👵 : 24호실 남자 말이야.

‘하루 종일 종이만 자르고 있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로렌조는 호기심에 이끌려 24호실로 달려갑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책상 밑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노트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의 로렌조. 24호실의 문을 열자 그 안은 짙은 외로움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고, 창가로 스며드는 흐릿한 햇빛에 의지해 힘 없이 종이를 자르고 있는 한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 : 그레고리오?
👴 : 난데?
👨‍🦰 : 할아버지가 이 노트 주인이세요?

로렌조가 발견한 책상과 노트의 주인은 바로 그레고리오 할아버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장난감 만들기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그 책상 서랍 칸칸이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을 담아두고 장난감 만들기에 푹 빠져 지냈었대요. 친구와 장난치다 계단 위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전구 하나를 깨뜨리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었던 할아버지는 그날 밤 ‘청동 드래곤’ 꿈을 꾸었고, 색종이 조각을 오려서 자신의 꿈을 기록했는데 그게 이 노트의 시작이었던 겁니다.

사춘기 시절 광견병에 걸린 개한테 물린 여자아이를 구해 준 날에는 ‘장화와 모자’ 꿈을 꾸었고, 어른이 되어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큰 폭발 사고가 일어나서 두 다리를 잃게 되었대요. 아내가 죽은 후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양로원에 가기 전에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끝마치고 책상 아래 깊숙이 숨겨두었던 거래요.

누군가 이 노트를 발견하고,
나를 찾아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
노트 한 장, 한 장마다
소중한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거든.

이렇게 나를 찾아 줘서 기쁘구나.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로렌조의 눈에는 자신을 찾아줘서 기쁘다고 말하는 할아버지가 여전히 슬퍼 보였어요.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졌어요. 마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담긴 비밀들을 풀어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 썼던 자신의 노트가 생각났어요. 로렌조가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노트를 드리자 할아버지 역시 자신의 노트를 로렌조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로렌조네 집 다락방 마루 밑에 숨겨둔 또 하나의 선물과 함께…

다락방도, 그레고리오의 방도 기쁨으로 가득 찼어요.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그레고리오 할아버지가 다락방 마루 밑에 숨겨둔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자신의 도구함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집에 돌아온 로렌조가 할아버지의 도구함을 찾아내서 열자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종이를 오려 붙여 기록할 때 쓰던 도구와 재료들이 가득 담겨 있었어요. 그리고 빛바랜 쪽지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고마운 꿈의 여행자 님에게,

이것은 나를 발견해 준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제 당신도 당신만의 꿈을 만들어 보세요.

그레고리오 드림.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꿈과 현실을 오가는 듯 기묘한 이야기와 멋진 그림으로 가득한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어떠셨나요? 스마트폰밖에 모르던 로렌조가 오래된 노트 한 권에 담긴 이야기를 쫓아 가는 과정과 마침내 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주인공 그레고리오 할아버지와 만나 깊은 교감을 나누는 장면, 그리고 로렌조와 그레고리오 할아버지가 주고 받는 선물들이 전해주는 또 하나의 감동, 연말연시 잠시나마 한가로운 시간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지 않나요?

저는 그레고리오 할아버지의 노트에 담긴 네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편 <꿈의 여행자>에서 성냥갑을 타고 바다를 표류하는 생쥐 그레고리오의 혼잣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디 저를 찾아 주세요’라고 구조 요청 메시지를 담은 유리병을 바다에 띄워 보내고 망망대해 위에서 끝없이 기다리는 생쥐 그레고리오. 마침내 그레고리오 앞에 나타난 잠수부 복장을 한 여행자는 그레고리오의 이름을 불러주고 먹을 것을 나눠준 뒤 이내 떠납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는 깨닫습니다.

나는 누가 구해 주기를 바랐던 게 아니라,
발견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다시 깊은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는
내 안에서 다시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 전 그레고리오 할아버지가 써두었던 이야기는 마치 로렌조와의 만남을 예견이라도 한 듯합니다. 짧은 만남 뒤 로렌조와 그레고리오 할아버지 두 사람은 아마도 다시 만날 수 없었겠지만 둘은 서로의 안에서 다시 솟아올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겠죠.

우리 주변의 아주 작은 것들, 누군가에게 잊혀져 버리고 만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문득 궁금해지게 만드는 그림책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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