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글/그림 루리 | 비룡소
(발행 : 2020/11/05)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를 보면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를 떠올려 봅니다. 주인에게 버림받을 처지에 놓인 당나귀, 개, 고양이, 수탉. 이들은 농장을 도망쳐 나와 브레멘으로 가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날이 어두워져 잠자리를 찾던 동물들은 숲속 작은 집을 발견하고 그곳에 살던 도둑들을 물리치고 작은 집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지요.

한평생 열심히 주인을 위해 일했지만 한순간 쓸모없는 존재가 된 네 마리 동물들은 우리 시대 약자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어요. 네마리 동물들이 함께 질러대는 소리에 놀라 도망친 어리석은 도둑들의 모습은 두려움이 상상 속에서 어떻게 커지는지를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바로 그 “브레멘 음악대”에서 이야기의 큰 틀을 가져와 현대적 색채를 덧입혀 재해석한 패러디 그림책입니다. 원작의 네 마리 동물들은 숲속 작은 집에서 행복을 찾았기에 브레멘에 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2021년의 그들은 왜 브레멘에 가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어느 도시를 묘사한 흑백의 면지 그림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익숙한 풍경 속에 익숙한 이웃들, 그 속에 그림형제 동화 속 주인공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요. 당나귀, 개, 고양이, 닭 그리고 도둑들까지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보세요.

도로에 걸린 표지판을 보니 브레멘은 여기서부터 500m 거리에 있어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꿈의 도시 브레멘을 지척에 둔 주인공들, 그들은 이곳에서 바쁜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처럼, 우리 이웃들처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택시 운전사였던 당나귀 씨는 나이가 많아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어요. 바둑이씨는 일하던 음식점이 이사하게 되면서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구요. 편의점 알바 야옹이 씨는 험상궂게 보인다는 이유로 내쫓겼어요. 노상에서 두부를 팔던 꼬꼬댁 씨는 단속에 걸려 쫓겨났죠.

이들을 내쫓는 이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아요. 거만하고 권위적인 자세로 이들에게 해고 통보를 내리고 있지요. 구석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는 이들의 위축된 표정과 처량한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동료들이 전해주는 참치캔 선물 세트를 받아든 당나귀 씨, 김치 한 통과 함께 홀로 남겨진 바둑이 씨, 아마도 유통기한이 임박했을 삼각김밥을 들고 편의점을 나온 야옹이 씨, 팔지 못한 두부를 짊어지고 길을 걷는 꼬꼬댁 씨. 우연히 이들은 같은 전철을 타고 같은 곳을 향합니다. 이들을 따라 걷는 길에 쓸쓸한 적막감이 감돌아요.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 끝없는 계단, 좁은 골목, 창문도 문도 꼭꼭 닫혀있는 집들은 갈 곳 없는 이들의 처지 같아요. 불 꺼진 컴컴한 골목길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상황을 보는 것 같습니다.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말없이 길을 걷던 이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불이 환하게 켜진 파란 지붕 집이었어요(재미있는 건 ‘꿈고개로 61번지’란 팻말이 붙은 아이러니한 이 집 주소 ^^). 동물들은 우연히 이 집에 살고 있는 도둑들의 신세한탄을 듣게 됩니다.

이제 뭐 하고 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살 걸 그랬네.

열심히 살았지만 일자리를 잃은 동물들, 열심히 살지 않아 현실이 위태로워진 도둑들. 이유야 어떻든 똑같이 답답한 현실에 놓인 그들이 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어요.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컷을 나누어 실시간 상황을 보여주는 이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똑똑똑 문 두드리고 새어 나온 환한 불빛으로 문이 열렸음을 알 수 있어요. 관심 없다는 듯 쾅! 문이 닫히고 동물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문이 열리고… 다섯 컷짜리 작은 그림이 참 많은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다시 문을 연 도둑들이 말했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네.

열심히 살지 않아 후회하는 자들과 열심히 살았어도 삶이 막막해진 자들. 한자리에 마주 앉았지만 이들에게 남아있는 건 절망 속 절망, 나오는 건 ‘이제 뭐 하지?’ 하는 한탄과 한숨 소리뿐.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그때 눈치 없이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이야기에 전환을 가져옵니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함께 모이니 한 끼 나눠 먹을 김치찌개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함께 모여 김치찌개를 나누어 먹는 동안 이들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고 시작한 상상 속에서 함께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이들, 문전성시를 이루는 찌개 집,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일하는 이들.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밖은 여전히 캄캄한 밤. 배부른 만찬이 가져온 상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어요. 그 밤 한 방에 모여 앉아 서로를 토닥이면서…

이렇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뒷면지에 남은 이야기가 조금 더 담겨 있어요. 앞면지가 닥쳐올 암울한 상황을 예고하는 흑백 그림이었다면 뒷면지는 생생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컬러 그림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물론 그들이 그날 밤 김치찌개를 나누어 먹으면서 상상했던 상황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죠. 산다는 건 꿈꾸는 것과는 늘 다르니까요. 마지막 면지 그림을 보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을 꼭 확인해 보세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을 의미 있게 그린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여러분 마음속 브레멘은 어디인가요? 지금 내 자리에서 행복을 꿈꿀 수 있다면 비록 지금 이곳이 브레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브레멘은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밤의 골목길은 쓸쓸함 그 자체였어요. 하지만 낮의 골목길은 다정다감합니다. 루리 작가는 보광동 골목길을 이 이야기의 무대로 그렸다고 해요. 걷고 싶고 만나고 싶은 골목길이에요. 서로 어울려 조율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 삶이 함께 어우러지며 흘러가길… 그림책을 덮으며 소망해 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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