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부리

부러진 부리

(원제 : Broken Beaks)
너새니얼 래첸메이어 | 그림 로버트 잉펜 | 옮김 이상희 | 문학과지성사
(발행 : 2004/02/20)

※ 2003년 초판 출간


“부러진 부리”라는 그림책 제목에서 아픔이 뚝뚝 묻어납니다.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듯 거칠고 뭉툭한 누군가의  손, 그 위에 내려앉은 볼품없이 비쩍 마른 작은 참새. 한참을 보고서야 위쪽 부리가 뭉툭하게 부러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물론 처음부터 참새의 부리에 이상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어느 날 느닷없이 참새에게 그런 불운이 찾아왔지요. 불행이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마련이죠.

부러진 부리

공원 숲 커다란 나무에 꼬마 참새가 살고 있었어요. 아침이면 꼬마 참새는 공원 근처 야외 식당으로 날아가 빵 부스러기를 찾아다녔어요. 누구보다 잽싸게 큼직한 빵 부스러기를 골라잡는 꼬마 참새를 다른 참새들은 그저 부러움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곤 했어요. 행운은 언제나 꼬마 참새 편인 것처럼 보였지요.

어느 날 꼬마 참새는 부리가 부러졌어요.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꼬마 참새에게 벌어졌어요. 부러진 부리로는 무엇도 집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어요. 꼬마 참새는 형편없이 약해졌어요. 배가 고파 식당 주변을 맴돌며 빵 부스러기를 구걸했지만 볼품없고 지저분한 새라고 생각해 아무도 꼬마 참새를 쳐다보지 않았고 누구도 먹이를 주지 않았답니다.

부러진 부리

그렇게 굶주리던 어느 날 꼬마 참새는 거리에 떨어진 큼지막한 빵 조각을 발견합니다. 살며시 빵 조각으로 다가가던 순간 어디선가 손 하나가 쑥 내려와 빵을 집었어요. 빵을 집어간 이는 꼬마 참새가 지금껏 봐 온 사람들과 다르게 형편 없이 야윈 데다 지저분한 사람이었어요.

떠돌이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꼬마 참새는 그 사람이랑 자기가 서로 닮았다는 걸 알아차렸어.
어쨌든 그 사람도 부리가 부러졌다는 걸 깨달은 거야.
자기 안의 부리, 눈으론 보이지 않는 부리 말야.

부러진 부리

꼬마 참새의 아픔을 알아본 건 떠돌이도 마찬가지였지요. 떠돌이는 꼬마 참새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둘 다 똑같은 신세구나.”

떠돌이는 빵을 똑같은 크기로 잘라 꼬마 참새에게 나눠주었어요. 그리고 다른 새들이 빵을 빼앗지 못하게 곁에서 지켜주었죠. 오랜만에 배부른 만찬을 즐긴 꼬마 참새는 행복을 느꼈어요. 행복하게 짹짹거리는 작은 참새를 보는 떠돌이도 행복했어요. 그날 밤 떠돌이는 공원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합니다. 꼬마 참새는 떠돌이의 헝클어진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들었어요. 부리가 반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면서…

부러진 부리
“부러진 부리” 그림책 속 꼬마 참새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

참새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그린 장면들이 유독 마음에 남습니다. 왼쪽 그림은 부리가 멀쩡했던 때의 참새 모습이에요. 누구보다 재빠르게 먹이를 낚아챈 꼬마 참새는 자신감 넘쳐 보입니다. 그 모습을 다른 참새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가운데 그림은 부리를 다친 참새가 구걸을 하는 장면이에요. 앙상해진 참새의 시선은 햄버거에 가있지만 소년들은 참새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어요. 간절한 참새의 눈길과 달리 소년들은 무심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고 불쾌해 보입니다. 마주 보고 참새에게 빵 반쪽을 나눠주는 떠돌이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에요.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 그림은 참새와 아저씨가 함께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그 뒤로 그 둘을 바라보는 행인들의 표정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부럽거나 불편하거나 경멸스럽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 혹은 시선은 아닐까요?

어떤 참새들은 꼬마 참새의 부러진 부리를 보고 두려워했어.
또 어떤 참새들은 꼬마 참새만 부리가 부러졌고 자기들은 멀쩡하니까
어쨌든 꼬마 참새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겼지.
나머지 참새들은 누군가 꼬마 참새를 도와 줘야 할 거라고 생각했어.

깊이와 통찰력으로 묘사한 묵직한 이야기에 세밀하고 섬세한 사실적 화풍으로 내면 깊은 곳까지 보여준 그림 작가 로버트 잉펜은 1986년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입니다.

기댈 곳 없는 냉혹한 현실 속에 떨어진 참새와 떠돌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끝을 알 수 없는 불운의 나락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건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냉혹한 시선일지도 몰라요. 버려진 빵 조각으로 이어진 우정은 그래서 더 따스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상처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희망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그린 그림책 “부러진 부리”, 고립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부러진 부리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 아닐까요? 부리가 반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밤입니다.

※ 2004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부러진 부리”는 현재 절판된 도서입니다. 그림책이 궁금하신 분은 가까운 도서관을 이용하세요.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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