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의 밤
토끼들의 밤

글/그림 이수지 | 책읽는곰
(발행 : 2013/08/26)


토끼들의 복수 vs. 토끼들의 밤 vs. 토끼들

“토끼들의 밤”은 이수지 작가가 영국 유학시절 스코틀랜드 여행 중에 만난 토끼들과, 런던의 하숙집 근처 아이스크림 트럭 아저씨를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책은 2002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픽션 부문 ‘올해의 일러스트레이션’에 선정된 후 200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어 스위스 문화부에서 주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책’으로도 뽑힐만큼 참신한 아이디어와 작가 특유의 개성이 넘치는 그림책입니다.

참고로 스위스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은 “La Revanche des Lapins” 인데(불어인걸로 봐서는 아마도 불어권 지역에서 출간된 듯 하네요) 우리말로 옮기면 ‘토끼들의 복수’. 그림책이 전하는 느낌 그대로 제목을 붙인 듯 한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될때는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토끼들의 밤”이 된 것 같습니다.

재미난 것은 이 그림책을 보는 사람들의 연령층과 감성에 따라서 제목이 아주 다양하게 나올 것 같다는 점입니다. 제목을 가린 채 그림들만 쭉 보여 주고 나서 그림책의 제목을 한번 지어 보라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아이스크림 대소동’이란 제목이 나오지 않을까요? 총싸움 칼싸움 좋아하는 씩씩한 개구장이 사내아이들이라면 ‘토끼들의 반란’, ‘토끼 침공’… 뭐 이런… ^^ 저라면 ‘슈퍼토끼의 아이스크림 사냥’ 정도…? ^^

그림책을 다 보고 난 후에 제 생각은 조금 달라졌는데요. ‘복수’도 ‘밤’도 필요 없이 그냥 “토끼들” 이라고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물론, 마케팅 측면에서는 채택되기 쉽지 않은 제목이겠지만요)

무서운 이야기 vs. 재미난 이야기

출판사에서 만든 북트레일러인데, 분위기가 마치 납량특집 같죠? 혹시나 싶어 출간일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2013년 8월 26일, 공포영화의 계절에 출간되었네요 ^^ 제가 보기엔 이렇게까지 으스스한 분위기의 그림책은 결코 아닌데… ^^ 과연 여러분들은 “토끼들의 밤”을 보며 어떤 느낌을 받을지 함께 보시죠.

토끼들의 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어두컴컴한 밤 한적한 숲속 도로를 아이스크림 트럭 한대가 지나가는데 난데 없이 토끼 한마리가 트럭 앞으로 뛰어듭니다.

토끼들의 밤

놀란 아이스크림 아저씨는 급브레이크를 밟고 아저씨도 트럭도 모두 앞으로 곤두박질 칠듯합니다. 그런데 토끼가 한마리가 아닙니다.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엄청나게 많은 토끼들이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토끼들의 밤

결국엔 토끼들에게 포위되고 만 아이스크림 트럭. 트럭을 가로 막고 서 있는 토끼들뿐만 아니라 룸미러를 이용해 앞뒤로 토끼들이 가득함을 보여 주는 아이디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림 좌우 가장자리의 숲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덤불 속에도 온통 토끼들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토끼들의 밤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아저씨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고 아이스크림 트럭은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네요. 그리고, 토끼가 그려진 표지판 하나. 지난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요? 안경을 매만지며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봐서는 당사자인 아저씨 조차 설명하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궁금한 점 한가지… 아저씨와 트럭 사이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잖아요. 토끼들이 저쪽에 있는 트럭에서 아저씨를 끌어다 놓은걸까요? 아니면 토끼들이 아저씨를 밀어내고 저만큼 트럭을 몰고 간걸까요?(흠… 왠지 저만 궁금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토끼들의 밤

정신을 차린 아저씨가 출발을 하고, 멀어지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바라보는 토끼들은 다들 손에.. 아니 앞발에 뭔가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헐~ 아이스크림이예요. 순진무구한 눈으로 토끼들이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핥아 먹고 있네요.

어떤가요? 위에서 잠깐 본 북트레일러의 느낌 그대로 받으셨나요? 아니면 으스스함보다는 재미있다거나, 참신하다거나 개성 있다 등의 느낌이신가요?


열린 스토리

“토끼들의 밤”은 아마도 두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게 아닐까싶습니다. 스토리를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만 전개하면서 작가가 제시한 그림 속의 단서들을 어떻게 따라 가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작가가 생각한 두가지의 스토리는 어떤걸까요? 제 나름대로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첫번째는 우리 아이들의 눈으로 볼 때 전개될 법한 스토리입니다. 토끼들은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을 뿐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알록달록 예쁜 아이스크림 트럭을 보고 그냥 보내 줄 수 없었던거죠. 게다가 아주 뜨거운 여름날었으니까요.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고 있는 토끼들의 표정에서 ‘복수심’을 발견한다는 건 우리 아이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논리와 이성만으로 이 그림책을 들여다 봤을 때 충분히 나올법한 스토리죠. 단서는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안경을 매만지며 어리둥절해 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바로 표지판입니다. 토끼가 많이 나타나는 곳이니 운전에 주의하라는 표지판.(물론, 토끼 입장에서 이 표지판은 ‘토끼들이 마음대로 뛰어 놀 수 있는 곳’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런 표지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죠. 토끼들이 로드킬을 자주 당한다는 뜻 말입니다. 표지판까지 세워 놓고서도 숱한 자기들의 동족의 목숨을 앗아간 트럭에 대한 엄중하지만 너그러운 경고.

토끼들의 밤

왼쪽 그림엔 토끼가 쓰러져 있고, 거기서부터 트럭의 타이어 자국이 시작됩니다. 갑자기 튀어 나온 토끼를 쳐버린 트럭이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기때문이겠죠. 오른쪽 그림은 토끼들의 밤이 끝나고 날이 밝아 오면서 기절했던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깨어 나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토끼들이 자기들의 친구가 차에 치어 죽은 자리에 아저씨를 끌어다 놓은걸지도…

스위스에서 발행된 제목대로 ‘토끼들의 복수’였다면 위 그림에서 토끼와 아이스크림 아저씨는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겠지만, 토끼들은 엄중하게 경고 한 후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저씨와 아이스크림 트럭은 다시 우리 아이들 곁으로 돌려 보내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토끼들의 밤’이 이 책의 제목으로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설마 스위스 버전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저씨도 온몸이 굳은 채 누워 있는건 아니겠죠….)

새로운 토끼의 탄생

토끼들의 밤
왼쪽 피터 래빗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위 그림에서 왼쪽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 받아 온 토끼 캐릭터 ‘피터 래빗’의 한 장면 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엄마 아빠와 아이들 모두 갖고 있는 토끼에 대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토끼죠 ^^ 이와는 대조적으로 “토끼들의 밤”에 등장하는 토끼들은 뭐랄까… 야생 그대로의 느낌? 날 것 그대로의 토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토끼다운 토끼 그대로의 모습 말이죠.

어쩌면 새로운 토끼의 이미지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로서의 토끼가 예쁘고 친근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토끼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그들의 숲속에서 그들의 먹이를 먹으며 그들끼리 살아가는 때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 아니었을까요?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동물원”, “검은 새” 등 이수지 작가의 작품은 거의 빼놓지 않고 보고 있는데 그의 그림책들은 언제나 편안합니다. 글자가 아예 없거나 절제된 사용으로 그림만으로 책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어서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토끼들의 밤”의 경우 출판사에서 다소 으스스한 분위기로 몰아가긴 했지만 제가 보기엔 이 책도 역시나 참신하고 개성넘치는 유쾌한 그림책입니다.

아빠, 나한테 물어봐 : 아이스크림 장수 아저씨와 엽기 토끼가 까메오로 출연하는 이수지 작가의 가장 최신 그림책입니다.(2016/03/22 업데이트)

Mr.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덕분에 그림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앤서니 브라운은 아닙니다. ^^ 이제 곧 여섯 살이 될 딸아이와 막 한 돌 지난 아들놈을 둔 만으로 30대 아빠입니다 ^^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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