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러제트

서프러제트 – 세상을 바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원제 : Suffragette – The Battle for Equality)
글/그림 데이비드 로버츠 | 옮김 신인수 | 대교북스주니어
(발행 : 2021/01/15)

※ 2019년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최종후보 선정작
※ 2020년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


노예처럼 사느니 차라리 범법자가 되겠다며 당당하게 세상에 맞선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서프러제트. 오늘 소개할 책은 2019년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최종후보에 오르고 2020년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에서 스페셜 멘션을 받은 그림책, 세상을 바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프러제트”입니다.

이 책은 120여 페이지로 두툼하고 글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저학령 아이들에겐 무리겠구나 하고 포기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서프러제트의 시작에서부터 마침내 투표권을 얻게 되기까지 그들의 투쟁의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짤막짤막하게 구성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매일 매일 조금씩 함께 읽어준다면 어린 친구들도 지루해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풍자적인 그림들은 마치 한 컷짜리 만평을 보는 듯해서 서프러제트들과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며 읽는다면 아이들이 더 쉽고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프러지스트 vs 서프러제트

서프러제트

2016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덕분에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서프러제트’가 무슨 뜻인지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서프러지스트’도 알고 있나요? ‘서프러제트’와는 같은 걸까요 다른 걸까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걸까요?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이 책에서 정의하고 있는 ‘참정권 운동가’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참정권 운동가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투표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쓴 사람들이에요. 이미 투표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투표권이 없는 다른 사람 또한 투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도 참정권 운동가예요.

참정권 운동가 중에서도 특히 여성을 ‘서프러지스트(suffragist)’라고 합니다. 투표할 권리를 뜻하는 ‘suffrage’에서 나온 말이죠.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평화롭게 운동을 벌이는 서프러지스트와 구분해서 전투적이고 과격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ette’는 뭔가 작고 모자라고 여성스럽다는 비하의 뜻이 섞인 접미사였다고 해요. ‘서프러제트’라는 말 역시 런던의 ‘데일리 메일’의 남성 기자가 여성사회정치연합의 회원들을 비웃기 위해 처음 사용했던 건데, 막상 서프러제트들은 이 호칭을 불쾌해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발간하는 신문의 제호도 ‘서프러제트’라고 정할만큼 말이죠.

서프러제트

여성의 참정권을 얻기 위해 활동한 것은 같지만 서프러지스트와 서프러제트의 투쟁의 수단과 방법은 달랐습니다. 위 그림에서 좌우의 포스터만 보더라도 둘이 어떻게 달랐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 나온 설명을 표로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서프러지스트서프러제트
민주주의적독재적
연합 형태로 운영독자적인 군대처럼 운영
회원이 뽑는 지도부선거를 거치지 않은 지도부
비폭력적이고 법 준수전투적이고 법 위반, 시민 불복종
구호 없음구호 '말 대신 행동으로!'
1800년대 중반에 운동 시작1903년부터 운동 시작
운동 기간 내내 비폭력 시위 유지1905년부터 1914년까지 시민 불복종 행동
전쟁 기간에도 여성 투표권 시위 지속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전투적 시위 중단
여성 참정권 단체의 남성 회원과 여성 투표권을 지지하는 남성들 포함여성은 독립적이어야 하므로 남성 회원 거부
서프러제트의 폭력적인 행동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의미를 해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한다고 믿음사람이 아닌 오직 재산이나 건물에 대한 폭력적인 행동만이 변화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음

말 대신 행동으로!

위 표에서 보듯이 서프러지스트들의 활동은 180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습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범(?)적으로 추진해온 참정권 운동이 수십 년간 아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자 1903년 ‘말 대신 행동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서프러제트들의 폭력을 동반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서프러제트

지금까지는 정치인에게 야유를 보내거나 피켓 시위 정도였지만 서프러제트들의 등장으로 유리창 깨기, 총리 관저 철책에 자신의 몸을 묶기, 총리의 일정마다 따라다니며 야유를 보내고 때리거나 총리가 연설할 극장을 불태우려는 시도까지 했어요. 메리 리라는 여성은 총리가 탄 마차에 도끼를 던지기까지 했다는군요(서프러제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던 당시 총리의 이름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입니다).

서프러제트

뮤리엘 매터스는 국회의 여성 방청석에 있는 창살에 자기 몸을 쇠줄로 묶어버린 적도 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란 슬로건이 적힌 길이가 약 24미터나 되는 수소 비행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전단지를 뿌리기도 했답니다. 뮤리엘의 비행기구 이야기는 전 세계 신문에 실렸다고 합니다.

정치 집회가 열리는 건물의 천장 채광창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쯤은 별 것 아니라 여길 정도로 과격했던 서프러제트들의 행동력.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여성들의 보수적인 옷차림새와 그들의 급진적인 행동이 만들어내는 묘한 대조가 인상적입니다.

여성 참정권, 그 투쟁의 역사

서프러제트

책은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으로 여성이 투표권을 빼앗기게 된 이야기에서 시작해 서프러지스트와 서프러제트들의 투쟁의 역사들을 거쳐 1928년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투표권을 보장 받게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 보여줍니다. 마치 헤드라인 뉴스를 브리핑하듯 주요 사건들 중심으로 짧은 호흡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서 두툼하지만 보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서프러제트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돌멩이에서부터 무시무시한 도끼까지. 서프러제트의 무기는 가정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크기가 작아서 머플러나 핸드백 속에 쉽게 숨길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남성 정치인들을 때리기 위한 채찍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심지어 총을 들고 다닌 서프러제트도 있었습니다.

유리창을 깨부수고, 우체통에 불을 붙이거나 잉크를 쏟아부어서 편지들을 못 쓰게 만들기도 하고, 골프장 잔디를 망치기 위해 산성 약품을 뿌리는 등 서프러제트가 벌이는 운동으로 인해 재산 피해를 입거나 삶에 지장을 입거나 공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프러제트는 투표권을 얻기 위해 싸울지언정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까지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리 쟁취를 위해 어느 누구도 목숨을 잃게 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충실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1928년 6월 14일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주 후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평등 선거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867년 5월 20일에 존 스튜어트 밀이 선거법 개정 법안에 여성 투표권을 제안했다고 들은 이후로 거의 61년이 지났다. 그러니 나는 이 투쟁을 처음부터 보게 되는 뜻밖의 행운을 누린 셈이다.

– 81세 밀리센트 개릿 포셋이 의회에 초대되어 새로운 법이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던 날 쓴 일기 중에서

서프러제트

서프러지스트와 서프러제트는 모두 여성이 정치 한복판에 서서 정치적 목소리를 갖게 됐을 때, 여성과 여성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오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완전한 평등을 이루기 위한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어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끈기와 대담한 투지로, 끊임 없이 싸워서 대단히 중요한 승리를 이뤄냈지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요.

법안이 처음 발의된 후 6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여성의 참정권. 수많은 서프러지스트들과 서프러제트들의 희생 끝에 얻어진 여성의 권리. 하지만 이건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하나씩 없애고 균형을 맞추기 위한, 그 어떤 거부감이나 혐오 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나라의 여성 참정권

출판사에서 두어 쪽 정도만 할애해서 우리나라의 여성 참정권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지 정도 간략하게 짚어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래서 몇 가지 찾아봤습니다.

  • 1948년 제헌 헌법에 이미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고 참정권을 보장했습니다 :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
  • 현재의 21대 국회의원 여성 비율 : 19%(지역구 29명, 비례대표 28명 총 57명)
    • 비례대표 여성할당제가 없었다면 19% 조차 불가능했을 겁니다.
      • 16대 국회 : 비례대표 30% 여성할당제 도입
      • 17대 국회 :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 + 교호순번제(홀수 순번을 여성에게 배정)
    • 지역구 역시 여성할당제 의무화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남은 과제로 보입니다.
    • OECD 회원국 비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헌법에 이미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만 보면 우리나라 남성들의 의식은 그나마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20년에 선출된 국회의원 300명 중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을 보면 법과 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헌 헌법에 보장된 우리나라 여성 참정권은 한국전쟁 때 만들어진 근로기준법(1953년)에서 보장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권리와 똑같은 처지입니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좋은 법을 가져다 베끼기만 했을 뿐 그 법 조문의 문장 하나 하나에 담긴 투쟁과 희생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전무한 탓에 법이 제정된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과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 때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답보 상태인 거죠.

우리도 아직 더 싸워야 합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후손의 그림책

‘Fantastically Great Women’ 시리즈의 작가 케이트 팽크허스트(Kate Pankhurst)는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Fantastically Great Women Who Changed the World” 작업을 하면서 자신이 에멀라인의 후손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걸 보면 직계는 아닌 듯 합니다(잠깐 검색해보니 아버지 쪽으로 혈통이 연결된 듯 합니다).

케이트 팽크허스트의 책은 한글판으로 여러 권 나오긴 했는데 ‘Fantastically Great Women’ 시리즈는 위에 언급한 “세상을 바꾼 아주 멋진 여성들”(머스트비, 2017)만 출간되어 있습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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