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세계

조용한 세계

글/그림 이미나 | 보림
(발행 : 2021/03/08)


짙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눈 내린 겨울 숲, 고요의 숲을 지키는 하얀 보름달,  한 무리의 늑대들이 무언가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어요. 그 정적 속에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밤입니다.

조용한 세계

언젠가 먼 곳에서 온 새를 만난 적이 있어.
이곳이 바다를 닮았다고 하더라.

숲이 끝난 자리 넓은 평원 앞에 다다른 늑대 한 마리, 길을 잃은 것일까요,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일까요. 지금 늑대가 쫓고 있는 건 무리에서 떨어진 사슴 한 마리. 그건 늑대 역시 마찬가지예요. 쫓는 늑대도 쫓기는 사슴도 모두 혼자입니다.

조용한 세계

혼자 다니는 짐승을 잡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 말하지만 늑대는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지막 한 방을 노리는 늑대의 공격 자세는 어딘가 어설프고 가벼워 보여요. 그와 달리 이런 상대를 이미 여러 번 만나 본 듯 상황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사슴의 눈빛은 아주 묵직하면서도 노련해 보입니다.

어린 늑대의 미숙함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음만 앞서다 보니 바로 눈앞의 사냥감만 바라볼 뿐. 얇은 얼음판 위에 올라섰다 그만 풍덩! 발굽에 맞고 물에 쫄딱 젖고 위풍당당 사냥꾼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요.

배를 곯는 날들이 계속됩니다. 사슴은 점점 멀어집니다. 포기냐 전진이냐 어떤 선택도 쉽지 않습니다. 저 멀리 사슴은 어쩌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꿈인지도 모릅니다. 꿈은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것,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쯤에서 포기하고 돌아섰을까요. 서슬 퍼런 추위 속에 달빛만이 고독한 늑대 곁을 지켜주는 밤이 찾아왔어요. 늑대는 다정한 친구들을 떠올렸어요. 함께 사냥하던 그리운 날들, 그 순간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났어요. 본능이 온전하게 깨어납니다.

조용한 세계

늑대가 달려갑니다. 사슴이 달아납니다. 커다란 사슴 그림자를 능가할 만큼 커다래진 늑대 그림자는 성장한 늑대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는 늑대와 사슴. 늑대는 설원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요?

생명 대 생명의 소리 없는 대결, 그 세계 안에 흘러넘치는 팽팽한 긴장감, 각성한 늑대의 달라지는 눈빛이 새롭습니다. 차가운 눈, 시린 바람, 철저한 고립, 갈등, 그리고 각성…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들, 모두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요.

어린 늑대의 성장 과정을 엄숙하고 가슴 뜨겁게 보여주는 그림책 “조용한 세계”, 늑대가 쫓은 건 사슴이 아니라 어쩌면 늑대 자신의 내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그림 한 장 한 장 모여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한 권의 그림책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쳤을까요? “조용한 세계”를 그림책으로 완성하기까지 한 편의 영상으로 만든 이미나 작가의 작업 일지가 더없이 반갑습니다. 수없이 그린 그림 속에서 늑대처럼 방황하고 울부짖었을 작가의 긴 시간들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이미나 작가의 “조용한 세계’ 작업 과정 보기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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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미
정선미
2021/04/16 11:40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미숙한 어린 늑대처럼 저는 항상 실수를 합니다. 삽화를 그린 보림님의 힘있는 붓끝에서 늑대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온빛지기
Admin
가온빛지기(@editor)
2021/04/16 12:17
답글 to  정선미

정선미님, 반갑습니다!
어린 늑대도 결국엔 설원 위에 우뚝 선 것처럼 정선미님도 멋진 늑대로 성장할 겁니다.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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