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섬에서 생긴 일

낙원섬에서 생긴 일

(원제 : Adam and Paradise Island)
글/그림 찰스 키핑 | 옮김 서애경 | 사계절
(발행 : 2008/08/01)

※ 1989년 초판 출간


오랜만에 찰스 키핑의 그림책 한 권 소개합니다. 국내에 출간된 키핑의 그림책 일곱 권중에서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 “조지프의 마당”, “빈터의 서커스”, 그리고 “윌리의 소방차”까지 네 권은 이미 소개했습니다. 오늘 함께 볼 그림책 “낙원섬에서 생긴 일”은 찰스 키핑의 유작입니다.

시 외곽에 있는 작은 섬의 개발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대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낙원섬에서 생긴 일”은 서민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권력자들, 그들의 몰가치적인 정치 활동으로 인해 삭막해져가는 사회와 늘어만 가는 소외 계층들, 콘크리트 아래 매몰되어가는 역사와 전통 등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을 찾게 해주는 그림책입니다.

모큐멘터리 그림책

책을 열고 앞쪽 면지를 보자마자 드는 생각, 실화일까? ‘낙원섬 횡단 도로 건설 계획’에 대한 시의원들의 찬반 투표 결과와 낙원섬과 그 주변을 상세히 보여주는 지도 탓입니다. 한 장을 넘기면 낙원섬과 도시를 잇는 돌다리에 누군가 락카로 쓴 구호가 눈에 들어옵니다. 덕분에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 힘을 얻습니다.

SAVE OUR ISLAND. NO! TO MOTORWAY

낙원섬에서 생긴 일
낙원섬 점방 거리의 채소 가게 새러와 정육점 주인 버티

또 한 장을 넘기면 돌다리 난간 위에 앉은 소년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르다보면 자연스레 낙원섬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한 장 더 넘기면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되는 점방 거리에 어느새 들어서 있습니다. 샛강 위에 떠 있는 낙원섬의 두 개의 돌다리가 시 외곽의 북부와 남부를 이어주는 지름길 역할을 하는 덕분에 차량 통행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들을 대상으로 가게가 하나 둘 열리며 형성된 점방 거리. 채소 가게 새러, 정육점 주인 버티, 생선 장수 퍼시, 빵집 베티를 차례대로 소개하고 나면 장면은 점방 거리를 벗어나 섬 한 켠에 있는 습지로 이동합니다. 습지에는 바르다 할아버지가 마차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습지를 지나면 허물어져 가는 잔교가 나오고 거기엔 칠이 다 벗겨진 낡은 배 한 척이 매여 있습니다. 늙은 털북숭이 개 한 마리, 새 두 마리와 함께 사는 벌리 할머니의 집입니다.

낙원섬에서 생긴 일
낙원섬을 덮어버린 거대한 거미같은 새 다리

아무 생각 없고 한심해 보이는 시의원들이 낙원섬 개발 계획을 얼렁뚱땅 세우는 장면, 점방 거리의 가게와 창고들을 사들이고 도로를 건설하는 장면들, 공사 기간 동안 개발에서 제외된 습지 위에 자신들만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아이들, 새 도로 완공식과 점방 거리의 가게를 잃고 새 직장에 취직한 가게 주인들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키핑의 모큐멘터리는 습지 위에 세운 새로운 놀이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흡입력 강한 키핑의 그림에 푹 빠져들면 발전과 성장을 지향하는 사회에 드리워진 그늘,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계층간의 불평등을 고발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와 현실의 괴리

완공식 장면과 시의원들이 사는 호화 주택들을 통해 키핑은 시민들을 위한다며 싸질러대는 정치 행위가 시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낙원섬 점방 거리나 습지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자들끼리 모여 그곳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죠. 심지어 낙원섬 주민들이 아닌 시의원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면서.

낙원섬에서 생긴 일
완공식장에서 소외된 시의원들, 연예인을 보러 온 팬들, 팬덤간의 난투극, 다양한 시위대의 모습

완공식에 참석한 시의원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결과물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자신들을 칭송해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거기 온 사람들은 행사에 초대된 연예인을 보러 온 사람들이거나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며 시위를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단상 위에 있는 자들이 시의원인지 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면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겠죠. 그들과는 아무 상관 없이 만들어진 계획의 결과물이니까요.

낙원섬에서 생긴 일
(왼쪽) 시의원들의 멋진 단독주택들. 앞 부분에 나온 시의원 8명 각각의 집이 어떤 걸지 한 번 매칭 시켜 보세요. / (오른쪽) 속 빈 강정 같았던 새 다리의 완공식과 달리 습지에 새로 세운 아이들의 놀이터 오픈식은 다정하고 즐거워보입니다.

이내 그 사실을 깨달은 시의원들은 불행해졌을까요? 천만에요.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계획에 무관심한 걸 어쩌면 그들은 더 좋아할런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잠깐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합니다. 게다가 신록이 우거진 교외의 호화 주택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걸요. 개발이라는 허울 아래 시민들의 삶을 희생시킨 댓가로 축재한 그들의 숨겨진 욕망의 실체입니다.

성인 vs 혁명가

낙원섬에서 생긴 일
다양한 시위 피켓들. 키핑이 바라본 그 당시의 사회상들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완공식 장면중에 다양한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나온 시위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가운데에서 이런 구호를 높이 치켜들고 서 있는 이가 보입니다.

TO FEED THE POOR IS SAINTLY TO ASK WHY THEY ARE POOR IS REVOLUTIONARY BISHOP.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들이 왜 가난한지 묻는 것은 혁명이다.

이 구호는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권력층으로부터 사회주의자나 반체제주의자로 낙인 찍혀 살해 위협까지 받기도 했던 카마라 대주교가 남긴 말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When I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me a saint. When I ask why they are poor, they call me a communist.”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 카마라 대주교(Dom Helder Camara)

거의 똑같죠? ^^

낙원섬과 그 인근에 사는 시민들을 위해 자신들이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뿌듯해 하던 시의원들. 그들은 개발로 생겨난 이익의 일부로 임대주택을 짓고 점방 거리 가게 주인들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자신들을 스스로 성인이라 여겼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이익은 자기 배 불리는 데 썼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숨긴 채 말이죠.

낙원섬에서 생긴 일
명찰 덕분에 왼쪽부터 새러, 버티, 퍼시, 베티임을 알 수 있어요. 물론 얼굴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긴 합니다만. 자신들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팔던 품목들을 슈퍼마켓에서도 그대로 이어어 팔고 있어서 더 착잡해집니다.

이제 옛날 가게들은 사라졌고, 가게 주인들은 새로운 니에타 슈퍼마켓의 냉장 식품 코너에 새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모두 일터에서 가까운 니에타 공동주택으로 돌아갔습니다.

니에타 슈머파켓의 점원이 된 가게 주인들은 니에타 공동주택에 살게 되었습니다. 니에타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고 받은 임금은 임대료로 다시 니에타 회사의 금고로 돌아가겠죠.

시장 주변에 대형 마트가 생기고 나면 시장 상권이 움츠러들고 장사가 힘들어진 상인들은 자신들의 가게를 포기하고 대형 마트의 점원이 되는 현실, 그 지역의 돈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대형 마트는 다시 지역 사회에 그 수익을 환원하는 일이 좀처럼 없기에 결국 그 지역의 경제가 망가지는 지금의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가난한지, 우리가 살던 집과 가게를 내어주고 고작 슈퍼마켓 점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우리의 추억과 삶이 배어 있는 이 곳을 지킬 수는 없었던 건지, 너와 나로 갈라서지 않고 우리가 되어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이 질문을 던지고 분연히 일어설 누군가가 우리들 사이에서 언젠가 나오기를, 습지에 자신들만의 낙원을 세운 아이들 속에서 세상을 바꿀 혁명가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키핑과 저만 그런 건가요? 👾

허물어버리려는 자 vs 지키려는 자

자신들은 살기 좋은 땅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면서 시민들이 살거나 생활하는 곳들마다 쫓아다니며 개발하려는 자들. 그들은 허물고 부숴버려야 사는 자들입니다. 거기에 어떤 역사가 담겨 있고 어떤 삶이 배어 있는지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 밀어내고 새로 짓는 과정을 통해 돈을 긁어내는 재주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낙원섬에서 생긴 일
낡은 것들을 모두 허물어버리고 콘크리트로 뒤덮어버리는 건설 현장

우리도 거기에 따르고 줄을 잘 서면 종종 그들이 사는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뒤돌아보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오로지 그들이 언제 어디로 가는지만 보면서 따라다니면 되니까요. 무엇을 잃건 상관 없지 않나요? 부자가 될 수 있다는데…

낙원섬에서 생긴 일
아담은 바르다 할아버지, 벌리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놀이터를 짓습니다. 오래된 가게와 낡은 창고를 철거한 곳에서 모은 폐자재들이 그들의 새로운 낙원으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삶이 모이고 또 모인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전통, 그리고 역사입니다.

키핑은 문제 제기만 할 뿐입니다. 허물어버리는 자들을 좇으며 살 것인지, 소중한 것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은 바로 우리들 몫입니다.

두서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뽑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껏 제가 말한 건 다 잊어버려도 됩니다. 찰스 키핑의 그림책은 직접 보지 않고는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없고, 보는 이들마다 각기 다른 충격과 감동을 받을 테니까요. 독특하고 강렬하다는 말로밖에는 그 느낌을 설명하기 힘든 그의 묘한 매력의 그림들, 신랄하다 못해 ‘이 거 그림책 맞아?’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풍자와 비판,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마음을 잃지 않고 아이들의 언어로 말하는 찰스 키핑의 “낙원섬에서 생긴 일” 놓치지 마세요!

※ 시의회에서 낙원섬 횡단 도로 건설 계획을 의결할 때 버니와 위니가 기권했다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면지에 나와 있는 찬반 서명을 보면 두 사람 모두 기권이 아닌 ‘반대’에 서명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번역 오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찰스 키핑의 그림책들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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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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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ㅁ
박선ㅁ
2021/09/28 15:56

개발에 밀린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공존하며 각자 얻어가는 의미에 대한 시선이어서 평화롭게 읽었습니다

이 선주
Editor
2021/09/29 12:23
답글 to  박선ㅁ

1989년판 그림책이지만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으니… 놀랍습니다.

반갑습니다. 박선ㅁ님

박선미
박선미
2021/10/01 00:31
답글 to  이 선주

찰스키핑의 책은 우울함과 약간은 기이한 표현?때문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책 내용은 온순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발에 공존이라뇨…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운 그것들이 찰스키핑의 책에서는 가능하더라고요.

김*화
김*화
2021/10/20 06:41

찰스 키핑 7권 모두 나올 때까지 무한 기다림 가능합니다.
꼭 완결시켜 주세요~^^

Last edited 2 years ago by 김*화
가온빛지기
Admin
2021/10/21 07:51
답글 to  김*화

김*화님 반갑습니다.
게으름 피우는 이*호 에디터 꽉꽉 조여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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