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와 버들 도령

연이와 버들 도령

글/그림 백희나 | 책읽는곰
(2022/01/07)


엄동설한 추위를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먹먹하게 그려낸 표지를 바라봅니다. 혹한의 숲속을 헤매고 있는 연이의 눈망울이 너무나 막막해 보여 그만 내 마음도 함께 얼어붙는 듯합니다.

동지섣달 추운 계절에 난데없이 나물을 구해오라는 계모의 요청에 눈 덮인 산속을 헤매다 신비로운 동굴에 사는 버들 도령의 도움으로 나물을 얻어오는 연이 낭자, 하지만 이 일을 수상히 여긴 계모는 연이 낭자를 미행해 동굴을 찾아내고 버들 도령을 죽입니다. 폐허가 된 동굴을 다시 찾은 연이 낭자는 버들 도령이 알려주었던 환생꽃으로 그를 살리고 둘은 혼인을 하게 되지요.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민담 ‘연이와 버들잎’ 이야기입니다. ‘콩쥐 팥쥐’처럼 착한 의붓딸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계모 설화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옛날 옛날에
연이라는 어린 여자애가 있었대.

연이는 나이 든 여인과 같이 살았어.

연이와 버들 도령

오랜만에 선보이는 백희나 작가의 신작 “연이와 버들 도령”은 옛이야기 ‘연이와 버들잎’ 이야기로 만든 그림책입니다. 민담에는 사악한 ‘계모’가 나오는데 그림책은 계모가 아닌 ‘나이 든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계모, 혹은 엄마나 할머니, 이모나 고모, 시어머니, 독재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네요. 한 공간 안에 있지만 결코 함께이지 못한 두 사람을 나누어진 두 개의 프레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이 든 여인은 연이에게 일을 아주 많이 시켰고 연이는 묵묵히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어요. 자기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지게를 진 연이 모습은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연이와 버들 도령

한겨울에 상추를 뜯어 오라는 나이 든 여인의 요구에 눈밭을 헤매던 연이는 나무 밑 작은 굴을 발견해 몸을 녹이려고 들어가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연이는 있는 힘을 다 해 긴 동굴 끝에 있는 작은 돌문을 힘껏 밀어젖혔어요.

연이와 버들 도령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돌문을 여는 순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그곳에서 만난 도령은 연이를 살뜰히 대접해 주고 버들잎으로 상추를 만들어 주고는 돌아가기 전 마당에 핀 꽃을 꺾어 주면서 위급할 때 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어요.

그리고 연이에게 돌문을 여는 주문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버들 도령, 버들 도령, 연이 나 왔다. 문 열어라.

한겨울에 구해 온 파릇한 상추, 의연한 연이와 달리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나이 든 여인. 결국 나이 든 여인은 연이의 실낱같이 작은 희망조차 앗아가 버리기로 마음먹습니다. 연이만의 세상을 몽땅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인상적이고 파격적인 화소(모티브)를 통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상황을 확연히 부각시키고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옛이야기 특유의 어법이라고 합니다.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는 나이든 여인이 연이를 학대하는 것을 넘어 버들 도령을 불태워 죽이며 갈등을 최고조로 몰아가는 대목이 바로 그 지점이지요. 하지만 그 잔혹함으로 인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흥미로운 옛이야기는 대부분 그림책으로 재탄생 되어 익숙한 반면 ‘연이와 버들잎’ 이야기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백희나 작가는 가감 없이 그림책 속에 잿더미가 된 동굴과 시커멓게 뼈가 된 버들 도령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이 잔혹한 장면을 지금껏 순종적이기만 했던 연이의 각성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연이는 눈앞에 펼쳐진 너무나 처참한 비극 앞에서 목 놓아 우는 대신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버들 도령의 뼈를 가지런히 모아놓고  버들 도령에게 받은 살살이 꽃, 피살이 꽃, 숨살이 꽃을 내려놓습니다. 얼어 죽을 뻔했던 연이를 살려주었던 버들 도령, 이번에는 연이의 힘으로 버들 도령이 다시 살아납니다.

“연이와 버들 도령”는 옛날이야기 치고는 파격적인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연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돌문을 열어 자신의 조력자인 ‘버들 도령’을 만난다는 설정도 그렇고 연이가 일방적으로 버들 도령의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눈길을 끌지요. 남자인 도령이 여자인 연이에게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돌문이 열릴 거라고 말한 점도 재미있습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 남자의 이름을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며 ‘문 열어라’라고 주문을 외친다니…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밥도 해주고 버들잎으로 상추도 만들어 주는 등 이름에 걸맞게 부드럽고 자상한 인물이지만 폭력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한 인물 버들 도령, 마냥 순종적이기만 했던 연이가 저주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자립적인 인물로 변모해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정이나 악인에 대한 단죄가 없다는 점도 아주 독특하지요. 얼핏 보면 콩쥐팥쥐와 서사 구조가 비슷해 보이지만 세세히 살펴보면  분위기가 굉장히 다른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백희나 작가가 옛이야기를 재해석한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계모가 아닌 나이 든 부인으로 표현해 상황에 맞게 해석할 여지를 둔 점, 그리고 연이의 신산한 삶에 위로와 온기를 가져다준 인물인 버들 도령을 연이와 꼭 닮게 표현한 부분도 눈길을 끕니다.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나 버들 도령이 다시 살아날 때 장면을 눈여겨 살펴보세요. 마치 연이가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혼인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맺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아마 그곳에서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죽을힘을 다해 동굴 문을 열어젖힌 연이, 변화는 이미 그 순간에 시작되고 있었어요. 행복은 결국 내 힘으로 내가 만들어 가는 것. 하얀 여백 위에 질문처럼 던져진 한 줄 문장이 많은 여운을 안겨줍니다.

나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생각되는 순간, 이 서사의 갈림길 앞에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새로 시작한다, 아니면 그대로 순응하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 옛 삶을 다시 살아간다? 그 선택은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긴긴 겨울 끝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 본문에서는 칭찬 일색이었지만 아쉬운 점 두 가지 정도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다른 작가였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백희나 작가여서 아쉬운 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네요.

하나는 색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실제 제작물이나 사진 원본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책으로 나온 결과물의 색감은 많이 아쉽습니다. 저처럼 책표지 사진 하나만 보고 ‘역시 백희나네!’하며 주문한 분들 많을텐데 본문의 다른 장면들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색감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이게 끝인가…’ 하는 서운함? 이야기에 푹 빠져서 백희나 작가 특유의 참신하고 기발한 엔딩을 기대했는데 그냥 끝나버렸다는… 백희나라는 이름이 이렇게나 무거워졌으니 작가가 그림책 한 권 발표하기가 쉽지않겠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함께 읽어보세요 : 손 없는 색시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5 2 votes
Article Rating
알림
알림 설정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모든 댓글 보기
0
이 글 어땠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주세요!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