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원 화실
나의 명원 화실

글/그림 이수지 | 비룡소
(발행 : 2008/12/26)


나의 명원 화실

교실 뒤 벽에 걸릴 그림들을 뽑는 시간이면 으레 맨 처음으로 내 그림이 뽑힙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구요. 왜냐구요?

나는 어떤 그림이 ‘뽑히는 그림’인지 잘 알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화가가 될 운명을 타고 난 것 같은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 생각하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명원 화실’이라는 못 보던 간판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 날부터 며칠동안 엄마를 조르고 졸라 명원화실에 다니게 되었어요. 화실 문을 두드리는 내 가슴은 진짜 화가를 만나게 될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죠.

나의 명원 화실

나는 첫눈에 진짜 화가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화가는 정말 진짜로 화가처럼 보였거든요.

키가 아주 크고 얼굴은 길쭉하고 고민을 많이 한 탓에 빼빼 말랐으며 긴 머리에 까만색 빵모자를 눌러쓰고 담배 파이프를 삐딱하게 물고 있을 거라 생각한 진짜 화가가 기다리고 있던 명원 화실, 나는 진짜 화가가 너무나 맘에 들었어요. 진짜 화가는 나에게 아무 때나 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명원 화실

다음날 부터 나는 명원화실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화실에는 고등학생 오빠 하나, 학교에서 가끔 본 준호라는 녀석과 그 동생이 다니고 있었어요(요 두 녀석은 그림은 안그리고 장난만 치고 있네요 ^^) 진짜 화가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어떤 것을 그리라 마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뭔가를 그리라 선생님이 정해주셨는데 말이예요. 나는 학교에서 그린 그림처럼 화려한 그림을 그려 뽐내 보려고 했지만 진짜 화가는 내 그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음 날 살짝 풀이 죽어 화실에 갔더니 진짜 화가가는 내게 커다란 스케치북에 연필로만 바가지를 그리라고 말했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연필만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진짜 화가는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얼마나 그릴 것이 많은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어요. 세상을 뚫어지도록 열심히 살펴보고 살펴 본 것이 내 마음 속에 옮겨지면 그걸 조금씩 조금씩 그려 나가라구요.

나의 명원 화실

나는 진짜 화가의 방 구경을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진짜 화가의 방에는 그림 그릴 때 쓰는 기름인 테레빈(유화 물감의 용제로 사용되는 기름) 냄새와 파이프 담배 냄새가 나서 다른 아이들은 그 방을 싫어했지만 나는 그 방 냄새가 이상하게 좋았어요. 침침한 진짜 화가의 방 한쪽에 놓인 이젤에 진짜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구요. 진짜 화가가 외출 한 날 책장 한쪽에 쌓인 훌륭한 다른 진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놓은 그림책들이며 벽에 걸린 수많은 그림들과 그림 도구들을 보는 것도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공사 하는 아저씨들이 오가기 시작하더니 화실 한쪽을 토끼며 나비 모양으로 오린 색종이를 붙이고 작은 책걸상을 놓고는 명원 화실 간판 옆에 유치원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았습니다. 고등학생 오빠 말로는 우리 몇 명만 가지고는 화실 운영이 힘들어 화실 반쪽을 유치원으로 꾸민 거라고 하네요.

나의 명원 화실

가을이 오자 진짜 화가는 내가 쓸 이젤을 하나 세워 주었습니다. 연필 그림만 그리던 내게 물감을 써서 꽃이 가득한 유리병을 그려 보라고 하셨어요. 나는 너무도 기뻤어요. 나는 물감과 물감을 섞어 기묘한 색깔을 만들어 꽃병을 그렸어요. 내 꽃병은 그다지 꽃병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 없이 내 그림을 바라보는 진짜 화가의 눈빛을 보면 내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진짜 화가처럼 테레빈 기름으로 그림을 그릴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나의 명원 화실

어느 날 우리는 진짜 화가를 따라 길 건너 앞산으로 야외스케치를 나갔어요. 준호와 동생은 밤송이를 주어 던지며 신나게 놀았고 고등학생 오빠는 단풍을 배경으로 밤나무를 그렸구요. 나는 진짜 연못에 마음이 끌려 연못가에 가서 앉았습니다. 진짜 화가는 내게 물을 한 번 그려보라 권했지만 나는 물은 색깔이 없어 어떻게 그릴까 고민을 했어요. 진짜 화가는 연못 속에 무엇이 보이는지를 내게 물었고 다시 물 위에는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어요.

진짜 화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물속에 잠긴 것, 물위에 뜬 것과 물위에 비친 그 모든 것들이 물을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물을 그리지 않고서도 물을 그리는……”

물론 그날 나는 준호와 준호 동생을 따라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느라 진짜 화가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했고 연못 그림도 다 그리지 못했습니다.

나의 명원 화실

겨울이 왔어요. 내 생일 아침, 엄마는 내게 편지를 하나 전해 주셨어요. 편지를 뜯어보니 세상에서 처음 보는 생일 카드가 들어있었습니다. 생일 카드는 하나하나 점을 찍어 만든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어요. 무수한 점 들 사이로 하늘도 있고 언덕도 있고 새도 있는 그림이었어요. 그림 뒷장에는 ‘축하한다’라는 흘려 쓴 진짜 화가의 글씨가 써 있었습니다. 손수 만들어 보낸 카드를 보자 내 마음 속 어딘가가 펑하고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어요. 가슴이 막 아프고 배도 저릿저릿 하는 것 같았죠. 작은 그림 하나가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니…

겨울이 가고 봄이 와 새 학년이 되자 너무 바빠 한동안 화실에 가지 못했어요. 내게는 좋아하는 아이도 생겼답니다. 나는 그 아이 생일에 진짜 화가처럼 근사한 생일 카드를 만들 생각에 더 바빴습니다.

나의 명원 화실

그런 어느 날 하교길 준호와 동생을 만나 명원화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는 너무나 놀라 화실을 향해 달려갔어요. 시커멓게 그을린 상가 건물을 바라 보며 화실이 있는 삼 층까지 뛰어 올라가보니 화실이 있던 자리의 모든 것이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진짜 화가의 방도 잿더미 속에 사라지고 없었고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림도, 그림책들도 진짜 화가의 이젤과 테레빈 기름통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나의 명원 화실

사람들은 누전때문에 불이 났다고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지요. 같은 층에 있었던 삼일 교회도 오미사 세탁소도 일등 속독 학원도 그대로인데 왜  나의 명원 화실만 타버렸을까요?

학교 미술시간에 더 이상 내 그림은 먼저 뽑히지 않았어요. 아주 가끔씩만 걸렸을 뿐이지만 나는 이제 내 그림이 뽑히든 안 뽑히든 상관 없습니다.

나는 이따금 내 방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둔 아름다운 점박이 생일 카드를 들여다 봅니다. 여전히 그 작은 그림을 볼 때마다 목이 따끔따끔 합니다.

내 그림도 누군가에게 이런 따끔따끔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장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이 이야기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다양한 그림책을 펴내고 있는 그림책 작가 이수지씨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그림책입니다.

나의 명원 화실

나의 명원 화실

이야기를 담은 글이 가득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장은 전체 화면을 그림으로 가득 채워, 글이 전달한 이야기와 못다한 이야기를 다시 한 장의 커다란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글을 읽으며 상상을 하고 다음 장에 펼쳐진 그림을 통해 더 많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배려가 눈에 띕니다. 노란색을 기본색으로 주황색과 파랑 색을 사용해 그려진 그림은 화려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때로는 엄숙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제일 먼저 교실 벽 뒤에 걸릴 만큼 그림을 잘 그린다 생각했던 한 꼬마 아이가 진짜 화가를 만나면서 그림에 대해 눈 떠가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는 “나의 명원 화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인정 받기 위해, 눈에 띄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묵직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짜 화가가 준 생일 카드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따끔따끔한 느낌을 받았던 작가가 그림책 마지막 구절 “내 그림도 누군가에게 이런 따끔따끔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요?”라고 했던 물음.  “나의 명원 화실”을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따끔따끔해 집니다.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 진짜 화가를 만날 수 있었던 이수지 작가는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나에게도 진짜 화가같은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지금 나는 조금 더 나은 삶을, 다른 삶을 살수 있었을까라는 물음 이전에 진짜 화가를 알아 볼 수 있는 진짜 눈을 가지고 있었던 어린 소녀의 혜안이 놀랍고 또 부럽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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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_빵
미_빵
2021/05/17 10:39

이수지 작가님 그림을 너무 좋아했는데. 진짜 화가를 만났던 화실을 다녔던 경험이 있으신가봐요-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심어주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가온빛지기
Admin
2021/05/17 21:20
답글 to  미_빵

미_빵님 반갑습니다. “나의 명원 화실”, 은근 마음 가는 책이죠. 이따금 답답하거나 싱숭생숭할 때 꺼내 읽으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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