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빤쓰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 빤쓰와 난닝구를 차려입고 하늘 높이 나는 꿈이었어요.

빤쓰와 난닝구, 어린 시절 할머니가 즐겨쓰시던 말이라 그런지 새삼 웃음이 납니다.^^ 슈퍼맨도 배트맨도 아닌, 그저 순백(그래서 자주 삶아 입어야 하는…)의 새 빤쓰와 난닝구를 입고 달밤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이네요.

형이 두 명, 누나가 네 명. 칠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 아홉 식구가 모여 사는 우리 집 밥상은 늘 전쟁터 같아요. 맛난 반찬은 눈깜짝 할 새에 사라지거든요. 어디 밥상 뿐인가요? 우리 집은 모든 것을 물려 받아야 한답니다. 책과 학용품, 옷은 큰 형-큰 누나-둘째 누나-세째 누나-막내 누나- 막내 형을 거쳐야만 내 차례가 돌아오죠. 한 두 단계의 물림이 아닌 무려 여섯 단계를 거쳐야지만 내 차례가 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의 멋진 재봉틀 솜씨 입니다. 엄마의 재봉틀을 거치면 해진 헌 옷이며 커다란 옷은 나에게 맞춤 옷으로 변신하거든요.

이런 형편이니 우리 칠남매 모두 새 물건에 목말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죠. 새 옷을 사달라 엄마를 졸라 댈 때면 아버지가 회초리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소리 치셨어요.

“요 녀석들, 혼이 좀 나야겠어!”

신체검사 날이 돌아오자  나는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서 깨끗하게 목욕하고 엄마가 만든 새 빤쓰를 입고 학교에 갔죠. 빤쓰만 남겨 놓고 모두 벗으라는 선생님 말씀에 처음엔 쭈뼛쭈뼛 했지만 친구들이 모두 벗자 나도 용기를 냈어요. 하지만 엄마가 새로 리폼(?) 해 주신 내 빤쓰의 빨간 나비 리본을 본 친구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빤쓰를 입었다구요. 너무나 창피해 하루 종일 친구들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나는 식구들도 모두 밉고 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헌 빤쓰 입고 학교 안 갈거라며 밥도 안 먹고 떼를 쓰는 나에게 아빠는 또 호통을 치셨죠.

그 날 밤 나는 꿈을 꾸었어요. 새 빤쓰와 난닝구를 입고 하늘 높이 나는 꿈을요. 이런 내 마음을 아셨을까요? 엄마는 다음 날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멋진 남자 빤쓰를 만들어 주셨어요.

나는 내 빤쓰가 참 좋아요. 아끼고 아껴서 이번 소풍 날에 입고 갈 거예요.


내 빤쓰
내 빤쓰

글/그림 박종채 | 키다리
(발행 : 2012/12/15)

그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

아이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똥봉투 들고 학교 가던 일, 옷이며 책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 할 것 없이 물려 받고 물려주는게 당연하던,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 화장실 하나를 온 가족이 함께 시간 맞춰 돌아가며 사용하던 시절, 아침이면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 형제 자매 수만큼 층층이 쌓여있던 그 시절 말이예요.

문득 돌아보면 그리움이 절절해 지는건 모두 다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일까요?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이렇게 추억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된다는 것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도 해보는 가을날입니다.

종례시간 담임 선생님이 “내일은 꼭 목욕하고 오너라.” 하고 말씀 하셨던 신체검사 날의 풍경을 물자가 귀해 속옷까지도 물려받은 걸 입어야 했던 아득한 시절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낸  “내 빤쓰”.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 짓게 되는 그림책입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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