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수 아저씨

뭔가 아주 절박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의 아저씨…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도대체 뭘 하는 걸까요? 혹시 배가 아픈 걸까요? 어떻게 보면 요즘 유행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 앞에서 열창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말이죠.

이 아저씨는 조선시대의 책 읽어 주는 남자 ‘전기수‘ 랍니다. 전기수란 한마디로 말하면 ‘이야기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 시절의 예능인 셈이죠. ^^ 그림책 뒷부분에 전기수에 대해서 설명이 아주 잘 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대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다가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추재기이(秋齊紀異) 중에서

동대문 밖에 사는 노인이 일주일을 순환 주기로 청계천에서 종각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대요.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나 나루터 등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판을 벌인 모양입니다.

재미난건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그림책 “전기수 아저씨”의 초반부에서도 이야기꾼 아저씨가 한참 재미있어지는 순간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바람에 주인공 영복이가 애를 태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렇게 중요한 대목에서 뚝 끊고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이야기 값을 내도록 하기 위함이겠죠. 그림책에선 엽전뿐만 아니라 참빗, 비녀, 고무신, 북어 등등 순박한 서민들의 마음이 물씬 풍기는 이야기 삯들이 수북히 쌓인답니다.

전기수 아저씨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전기수. 전기수 아저씨의 이야기에 잔뜩 울상이 되기도 하고, 깔깔대며 웃기도 하다가 이야기를 뚝 끊고는 얄밉게 지그시 눈을 감고 이야기 값 기다리는 전기수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생각만 해도 참 소박하고 사람 사는 냄새 물씬 느껴지지 않나요?

환하게 트인 곳에서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같이 듣던 사람들과 자연스레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듣다 지루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 마저 하고, 가게 주인 눈치 보다 슬쩍 빠져 나와 어제 듣던 이야기 마저 들으러 가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이지만 결국엔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맛과 운치가 있었던 그 시절의 풍경… 그림책 “전기수 아저씨 : 걸어다니는 이야기 보따리”를 통해 아이와 함께 느껴 보세요!

조선시대에 전기수 아저씨가 있었다면 요즘은 ‘책 읽어 주는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 지난 2009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요. 전기수 아저씨들이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입담을 자랑했다면, 이야기 할머니들은 손주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륜에서 나오는 포근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겠네요.


전기수 아저씨
전기수 아저씨 : 걸어다니는 이야기 보따리

김선아 | 그림 정문주 | 원문 풀이 해설 안대회 | 장영

전기수 아저씨의 재미난 이야기에 엄마도 호박엿도 다 잊어버린 채 푹 빠져버린 영복이, 영복이의 토막 이야기에 그 뒷얘기가 궁금해 한밤중에 영복이네 담장에서 애가 끓는 춘삼이. TV, 게임기에 스마트폰까지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엔 상상도 하기 힘든 광경이죠.

조선에서 가장 재미난 이야기꾼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웃다가 울고, 울다가도 웃는 사람들. 감칠맛 나는 이야기로 듣는 이들을 잔뜩 긴장시키며 결정적인 순간까지 끌고 갔다가는 갑자기 이야기를 싹둑 자르고는 다음 날을 기약하곤 훌쩍 떠나는 전기수 아저씨의 뒷모습에 망연자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

굳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 없이 엄마 아빠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한번 돌이켜보세요.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시간은 한 달 단위로 흘러갔었다고 해요.(“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중에서) 한 달에 한 번 받아 보는 두툼한 만화 잡지 ‘보물섬‘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시절 사람들에 즐거움을 준 건 어떤 것들이었는지 들려주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배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림책 “전기수 아저씨”가 전기수에 대한 소개와 맛배기라면 본격적으로 전기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이야기책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에서 가장 재미난 이야기꾼“이란 책입니다. 60여쪽의 길지 않은 분량에 짤막한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재미와 감동을 함께 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전기수는 그저 이야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달관한 듯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는 경지에까지 이른 진정한 이야기꾼이랍니다. 그림책 “춤추고 싶어요“로 아주 멋진 그림과 이야기를 들려줬던 김대규 작가가 삽화를 맡아 이야기의 재미를 한층 더해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서 이야기 하나씩 매일 밤 읽어 주기 딱이랍니다. ^^

Mr.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덕분에 그림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앤서니 브라운은 아닙니다. ^^ 이제 곧 여섯 살이 될 딸아이와 막 한 돌 지난 아들놈을 둔 만으로 30대 아빠입니다 ^^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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