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틴은 수줍음 많은 소녀입니다. 그래서 레오틴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꽁꽁 숨기고 다녔습니다.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레오틴을 아이들은 놀려댔습니다. 그럴수록 레오틴은 점점 더 자신의 머리카락 뒤로 숨어 움츠러들기만 했습니다.

레오틴의 긴 머리레오틴은 아빠가 없습니다. 레오틴이 어렸을 적에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어렸을 때라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던 레오틴은 자신의 머릿결이 아빠를 닮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어요.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아빠를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죠. 얼굴을 뒤덮어 가릴만큼 길게 자란  레오틴의 긴 머리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틴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레오틴의 커튼 머리를 놀려대던 아이들이 레오틴을 거칠게 밀어버리는 바람에 레오틴이 휘청 거리며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긴 머리카락이 레오틴을 떠받쳐 주면서 넘어지지 않게 도와줬습니다. 머리를 감고 나면 긴 머리를 쉽게 말릴 수 있도록 드라이어를 들어 주고,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빛나던 어느 밤엔 반짝이는 별들을 보라며 레오틴을 끌어당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시험을 보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답을 척척 써주기도 했어요.

문제는 긴 머리가 능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레오틴과 커튼 머리 너머 세상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커튼 머리 뒤에 숨은 레오틴에게 친구가 되어줄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같이 놀자거나 도시락을 같이 먹자거나 함께 숙제 하지 않을래 하고 물어오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는 학교 생활…… 아빠의 머릿결을 닮은 긴 머리카락이 늘 레오틴을 지켜주긴 하지만 언제까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레오틴의 긴 머리카락이 한 친구를 향해 살랑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올라프. 아이들 사이에서는 괴짜 가수로 통하지만 사실 올라프는 음악을 사랑하는 순수한 소년이었습니다. 올라프는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친구였죠. 그런 올라프와 레오틴이 복도에서 마주친 순간 레오틴의 긴 머리카락이 올라프를 갑자기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두 아이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때까지도 노래를 흥얼거리던 올라프는 노래를 멈춘 채 레오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레오틴의 예쁜 얼굴과 맑은 눈빛을 보게 된 순간 올라프는 한 눈에 반해버렸던 겁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노래 하나가 입속에서 맴돌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올라프의 입 밖으로 나온 노래는 수줍은 고백입니다.

“너 참 예쁘다.
‘커튼 머리’로 얼굴 가리지 마!”

언제 어디서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올라프에게 레오틴의 마음이 끌렸던 걸까요? 아니면 언제나 레오틴을 아빠처럼 돌보던 긴 머리카락이 레오틴을 올라프에게 인도했던 걸까요? 그날 이후 두 아이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레오틴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긴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잘랐습니다. 아빠의 머릿결을 닮았던 머리카락은 순순히 레오틴의 뜻을 따랐습니다. 레오틴과 올라프는 둘만의 비밀 장소에 머리카락을 묻어주었고, 올라프는 레오틴과 아빠의 머릿결을 닮은 머리카락의 이별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레오틴의 긴 머리

레오틴의 머리카락은 짧아졌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였어요.
이제 레오틴은 그 어느 것으로도 눈을 가리지 않아요.
더 이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올라프, 그 곁에 나란히 누워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레오틴, 그리고 올라프의 머리를 감싸쥔 레오틴의 짧아진 머리카락. 저는 이 그림을 보며 결혼식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입장해서 사랑하는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신랑, 그리고 방금 예식장에 들어선 곱게 단장한 아리따운 신부, 그리고 떨리는 신부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그 곁을 나란히 걷고 있는 신부의 아버지. 신랑과 신부의 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좁아질 때마다 신부 아버지는 손에 점점 더 힘을 주게 되겠죠. 이제 곧 놓아줘야 할 딸아이의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18년 전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싱글벙글 서 있던 저와는 달리 딸의 손을 제 손에 쥐어 주던 아내의 아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건 딸아이를 낳던 날입니다. 방금 앙~ 하고 작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온 딸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몇 해 전 나의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리던 내 아내의 아버지의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딸아이를 키우며 내 딸은 절대 시집 안보내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더랬습니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세상 어느 놈한테도 못주겠다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 마음이야 여전합니다만 딸아이가 자란만큼 아빠의 생각도 자라는 모양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지만 언제까지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없음을, 나를 대신해 딸아이의 곁을 지켜줄 누군가가 있어야 함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니 말입니다.

18년 전 내 아내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의 손을 건네 주시며 흘린 눈물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겠죠. 올라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레오틴의 짧은 머리 역시 같은 마음일테구요. 딸 가진 세상 모든 아빠들을 위한 그림책 “레오틴의 긴 머리”였습니다.


레오틴의 긴 머리
책표지 : 씨드북
레오틴의 긴 머리

(원제 : Les Chevaux De Leontine)
글/그림 레미 쿠르종 | 옮김 이정주 | 씨드북

“레오틴의 긴 머리”는 아빠를 잃은 슬픔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살아가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짜 투명인간”으로 알게 된 레미 쿠르종은 우리 삶의 무게에 대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들려주려고 애쓰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삶의 희로애락을 멋대로 축약하지도 않고, 어설픈 재밋거리를 억지로 끼워넣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 한 줄 한 줄을 곱씹고, 그림 한 장 한 장을 되새기다 보면 작가가 심어 놓은 삶의 의미를 우리 아이들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짜맞추듯 설명해 준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말입니다.

레미 쿠르종의 그림책은 느린 그림책입니다. 아주 서서히 내 마음에 다가서는 그림책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씹고 씹을수록 입안에 그 풍미가 가득해지듯, 그의 그림책은 보고 또 볼수록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마음 속 깊이 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