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현실 속에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라며 멍청이라고 불릴지라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고백하듯 써 내려간  미야자와 겐지의 시 한 편이 찬바람 부는 겨울 하루를 촉촉히 적셔줍니다. 내면에 따뜻함과 지고지순함을 품은 바보, 칭찬에도 미움에도 꿋꿋이 자신을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발한발 걸어간 바보들 덕분에 여전히 세상은 살만한 것 같습니다.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수많은 착한 바보들의 온기로 오늘도 따뜻한 하루입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
책표지 : Daum 책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 그림 야마무라 코지 | 옮김 엄혜숙 | 그림책공작소 

“비에도 지지 않고”는 1931년 11월 3일 미야자와 겐지가 자신의 삶의 철학을 오롯히 담아 쓴 시를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과 함께 한 권의 그림책으로 완성한 책입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자아성찰적 어조로 써내려간 시에 변화무쌍한 자연 풍경 속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섬세하게 때론 투박하게 그려낸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이 어우러져 더욱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미야자와 겐지는 어른들의 마음 속에 아득한 향수로 남아있는 “은하철도 999”의 원작 소설인 “은하철도의 밤”을 쓴 작가입니다. 가난 때문에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병든 엄마와 꿋꿋하게 사는 조반니는 은하수 축제가 열리던 날 밤 꿈 속에서 친구 캄파넬라와 은하철도를 타고 은하수를 여행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가 담긴 “은하철도의 밤” 속에는 겐지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희생하는 삶의 가치’가 오롯이 담겨 있어요.

미야자와 겐지는 1896년 일본 이와테현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고향인 이와테현은 옛부터 가뭄이나 냉해가 잦아 대부분의 농민들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농업고등학교 시절 읽은 ‘법화경’을 자신의 문학 작품 밑바탕으로 삼았던 미야자와 겐지는 오두막집에 살면서 벼농사를 짓고 농민들의 수확을 늘리기 위해 비료 연구도 하고 농민을 위한 농민 예술론 강연도 하며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던 작가입니다.

1921년부터 동화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오랜 시간 퇴고와 개작을 했기 때문에 창작 연대를 알기 힘든 작품이 많고 또 부분적으로 분실된 원고가 많다고 해요. 현재 백여 편의 작품이 남아 있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 된 책은 시집 “봄과 아수라”와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  단 두 권뿐으로 두 권 모두 자비로 출간했다고 하죠. 과로와 영양실조로 힘든 시절을 보낸 겐지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폐렴의 악화로 죽는 날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평화와 생태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대의 진정한 바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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