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눈 : 공광규 시 그림책

흰 눈

공광규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다 못 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지에 앉는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는다.

“흰 눈”은 공광규 시인의 시에 예쁜 그림을 입힌 그림책입니다. 시가 하도 좋아 처음 책을 펼쳐들면 그림이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겨우내 다 내리지 못한 눈이 차가운 날씨에 봄을 기다리는 매화나무 가지에 내려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내려 앉는다… 앉다 앉다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 성긴 머리 위에 가만히 내려 앉는다… 하… 시인이 맞이하는 봄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봄은 할머니처럼 포근합니다.

한참을 싯귀에 빠져 있다 문득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의 아침. 할머니의 하루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합니다.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 묵은 빨래들을 빨아 널고, 봄내 가득한 나물도 캐고, 고양이 밥도 챙겨주다보면 어느새 따사롭던 봄볕은 붉은 노을과 저녁 뭉게 구름들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흰 눈

김이 모락모락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갓 지은 밥에 봄나물 얹어 이른 저녁을 막 드시고 난 할머니는 돌담 너머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내일은 고추 모종을 밭에다 옮겨 심어야겠구나… 이런 생각? 겨우내 쌓였던 눈도 모두 녹아 없어지고 날도 풀렸으니 돌아오는 주말엔 서울 사는 큰 아들이 올망졸망 손주 녀석들 데리고 오려나… 이런 생각?

흰 눈

하지만 이 그림 덕분에 착각에서 금방 빠져나오게 됩니다. 할머니들이라고 늘 농사일 생각, 자식들 생각에만 빠져서 지내실라구요. 그림책 “흰 눈”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겨우내 다 못내린 눈이 앉다 앉다 내릴 자리 찾지 못하고 할머니의 성긴 머리 위에 앉았지만 할머니의 봄빛은 고운 노랑입니다. 애기똥풀일까요? 해지고 어스름한 봄날 할머니의 돌담집은 할머니의 노란 봄빛으로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빛이납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겠지요. 긴 겨울 끝의 봄날을, 내 생의 봄날을 말입니다.


흰 눈
책표지 : Daum 책
흰 눈

공광규 | 그림 주리 | 풀과바람
(발행일 : 2016/05/09)

2016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공광규 시인은 얼마전에 소개했던 그림책 “청양장”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청양장”의 경우엔 글도 글이지만 한병호 작가의 그림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글 맛을 미처 느끼지 못했었는데, 뒤이어 나온 “흰 눈”을 통해 공광규 시인을 제대로 만나본 듯한 느낌입니다. 덕분에 이번 주말은 내내 그의 시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흰 눈”을 그림으로 담아낸 주리 작가 역시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삽화를 그려 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인의 마음을 읽기 위해 애쓴 흔적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이 그림책을 받아든 공광규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시에 대한 답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요?

흰 눈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푸근하게 담아낸 시, 그 시에 담긴 삶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이 참 잘 어우러진 그림책 “흰 눈”, 어릴 적 생각하며 오랜만에 어머니 곁에 나란히 누워 읽어드리고 싶은 그림책입니다.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