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씨의 의자

햇살이 눈부신 날입니다.
시집을 읽기에 좋은 날이지요.

작은 화분, 따뜻한 담요 한 장, 작은 찻잔과 차 주전자, MP3 플레이어, 품에 꼬옥 안고 있는 시집 한 권…… 두 눈 지그시 감고 햇살의 눈부심을 즐기고 있는 곰씨, 한눈에도 곰씨의 여유로움이 묻어납니다. 곰씨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시집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그러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거든요.

착한 곰씨는 어느날 여행을 하느라 몹시 지쳐 보이는 탐험가 토끼가 쉬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의자 한 켠을 내어주었어요. 또 한 번은 슬퍼 보이는 무용가 토끼를 위로해 주기도 했어요. 곰씨의 의자 앞에서 만난 두 토끼는 곧 결혼을 했고 곰씨는 이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토끼 부부에게서 첫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만해도 곰씨는 견딜만 했어요.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토끼 가족 때문에 곰씨의 사생활은 점점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전처럼 여유롭게 차를 즐기기도, 음악을 감상하기도 어려워졌죠. 토끼 부부에게서 아이들이 쉬지 않고 태어나면서 곰씨는 자신의 의자를 점점 더 많이 내주어야 했고 곧 그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어요. 모두가 즐거웠지만 곰씨만은 그렇지 못했어요. 토끼들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정작 토끼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어요.

친절한 곰씨는 고민하고 걱정하고 요리조리 궁리만 하다 그만 병이 나고 말았어요. 그런 곰씨를 찾아온 토끼들의 정성어린 간호 덕분에 곰씨는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요.

곰씨는 마음을 굳게 먹고 토끼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곰씨의 용기 덕분에 서로에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토끼들도 알게 되었거든요.

곰씨의 의자 앞에서 맺게 된 토끼 가족과의 인연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복잡 미묘하게 변해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던 곰씨의 의자는 토끼 가족으로 인해 본 모습을 잃고 말아요. 극기야 토끼들이 오지 못하도록 곰씨는 자신이 사랑했던 공간을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소위 착한 아이 증후군(Good Boy Syndrome)이라고 말하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욕구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은 ‘착한 것=좋은 것, 착하지 않은 것=나쁜 것’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에게 내면화한 결과로 나타난다고 해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 한 사람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에 억지 미소를 짓고 극기야 끙끙 앓고 마는 곰씨의 이야기도 그런 예입니다. 자신의 공간과 사생활을 모두 빼앗겼으면서도 어찌 한 마디 못하고 마는 곰씨.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만으로는 관계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관계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유지됩니다.

토끼 가족에게 용기를 내 속마음을 털어놓자 이들의 공간은 곰씨의 의자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숲이라는 훨씬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집니다. 곰씨는 이제 자신의 의자에 누워 피곤한 몸을 달랠 수도 있게 되었구요. 숲 속을 산책하는 마음의 여유도 얻었어요. 토끼들 역시 이곳 저곳을 누비며 행복하게 살게 되었지요.

혹시 누군가의 친절함에 들러붙어 그 사람의 불편함 따위는 안중에 없는 토끼처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지요, 곰씨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해야 할 말을 가슴 속에 꾹꾹 담아놓고 늘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곰씨의 의자
책표지 : 문학동네
곰씨의 의자

글/그림 노인경 | 문학동네
(발행일 : 2016/09/23)

2016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감각적인 스타일의 그림으로 다양한 주제를 그림책 속에 자유롭게 선보여왔던 노인경 작가의 그림책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곰씨의 의자” 역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관계가 무엇인지를 세련된 글과 그림으로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어 아이들이 읽어도,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그림책이에요.

무던하고 참을성 많은 곰씨는 하얗게, 수다스럽고 열정적인 토끼 가족은 알록달록 무지갯빛으로 표현해 등장인물의 성격을 예측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그림책 속에 곰씨의 마음을 열심히 대변해주는 말 없는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요. 의자 곁에 말없이 놓여있던 작은 꽃 화분 꼭 눈여겨 보세요. 곰씨의 기분에 따라 다양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작은 꽃이 정말 사랑스럽답니다. ^^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함께 행복해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 갑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5 1 vote
Article Rating
알림
알림 설정
guest

2 Comments
오래된 댓글부터
최근 댓글부터 좋아요 순으로
Inline Feedbacks
모든 댓글 보기
kooroom
kooroom
2017/01/03 14:27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학교 선배입니다! 여기서 보니 더더 반가와서! 댓글안남길수가 없네요 ㅎㅎㅎ

2
0
이 글 어땠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주세요!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