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있다.
파란색 비닐과 텐트로 가득한 비 내리는 공원,
우체부 한 명이 흠뻑 젖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집이 없어진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1995년 3월, 대지진으로부터 두 달 후의 고베.
건물도 도로도 생활도 망가지고, 개도 고양이도 없는 거리를
퍼즐을 맞추듯이 나는 걸었다.
풍경은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지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스케치북이 백지인 채로 돌아온 여행이었다.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은,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으로써 안심하게 되니까.
눈과 손이 기억한 후,
어딘가에 집어넣고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3년 후의 봄, 고베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고베 대지진 복구 지원 자선 행사인
‘천 명의 첼로 음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지 스케치북에서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이 편지는 그 우체부가 배달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열세 살 때 첼로를 만났다.
그 후로 첼로를 켜면서 얼마나 나 자신을 격려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1998년 11월, 천 명 중 한 사람이 되어서
나는 다시, 잊어서는 안 될 풍경 앞에 섰다.

인간의 모양을 한 악기,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악기, 첼로.
첼로를 켜는 사람의 모습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펼쳐졌다가 겹쳐지는, 파도 같은 천 개의 활이
마음을 담고 기도를 담아 멜로디를 이어간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풍경들이
첼로 소리가 되어 흐르던 음악회.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는 다 달라도
마음을 합하면 노래는 하나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닿는다.

백지였던 스케치북은
첼로를 켜는 사람들의 크로키로 메워져 갔다.
그로부터 2년, 이 그림책이 완성되기까지
내가 그린 첼리스트도 천 명이 되었다.

– 2000년 가을 이세 히데코

※ 위 글은 그림책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에 실린 이세 히데코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책표지 : Daum 책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글/그림 이세 히데코 | 옮김 김소연 | 천개의바람
(발행 : 2012/06/30)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는 고베 대지진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그림책입니다. 커다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과 그 아픔을 나누고 보듬어주며 위로하는 이웃의 마음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출판사는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닫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냈다고 합니다(어쩌면 이 책에서 출판사 이름을 따온 걸 수도 있겠군요).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차가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얼마 전 인양에 성공했고, 무사히 뭍으로 올려져 9명의 미수습자를 찾기 위한 준비를 끝내고 며칠 전부터는 드디어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 함께 촛불을 밝히고 눈물 흘리던 우리 이웃들의 마음이 그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꼭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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