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사람들은 내가 낮잠을 자는 줄 알아요.
하지만 모르는 말씀!

얼굴에 행복이 가득한 할머니가 소파에서 빙긋이 웃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기가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낮잠을 주무시는 게 아니라면 할머니는 과연 무얼 하고 계신 걸까요?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납시다.
이번에는 달로 소풍이나 갈까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정한 입맞춤과 함께 속삭입니다. 내일 다시 만나자고, 이번엔 함께 달로 소풍을 가자고. 할머니의 얼굴은 아까 잠들어 있을 때만큼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요즘 말로 참 달달하고 꽁냥꽁냥합니다. ^^

그런데, 달콤한 커플은 왠지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등에는 날개가 돋아 있고, 저만치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천사는 시간에 쫓기는듯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봅니다.

사실 할머니는 얼마 전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줄로만 알았었는데….. 할아버지는 천사가 허락해준 외출 시간을 이용해서 매일 오후 네 시부터 일곱 시까지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물론 할머니의 꿈 속으로 말이죠.

푸른 초원에서 사자들과 뛰어놀기도 하고, 공룡을 타거나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동물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기도 하죠. 스핑크스와 수다를 떨기도 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용감하게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한밤중에 돌고래와 수상스키를 타거나 인어와 유니콘과 어울려 놀기도 하구요. 어느 날은 집안에 단둘이 다정하게 앉아서 지금껏 살아왔던 수많은 나날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가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한대요.

이제 자기는 낮잠을 자는 게 아니라는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낮잠은 그저 단순한 잠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지금껏 가보지 못했던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며 행복을 만끽하는 달콤한 순간입니다.

낮잠에서 깨어나 달콤한 설탕 두 스푼을 넣은 향긋한 차 한 잔에 다시 한 번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 할머니의 행복한 미소가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이별은 쓰디 쓴 슬픔이 아니라 달콤한 행복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원제 : My Henry)
글/그림 주디스 커 | 옮김 공경희 | 웅진주니어
(발행 : 2017/05/20)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주디스 커, 1924년생이니 올해로 나이가 무려 94세네요.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가 2011년에 영국에서 초판이 발행되었으니 88세에 만든 작품이군요. 유명한 각본가였던 남편 나이젤 닐과는 2006년 사별했으니 아마도 이 그림책은 주디스 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주디스 커는 2019년 5월 22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찾아보니 주디스 커와 나이젤 닐 두 사람은 1954년에 결혼했습니다. 52년이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남편을 떠나보낸 후 홀로 남은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그리움 가득한 상상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들의 것만큼이나 달콤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신산함을 모두 겪으며 오랜 세월 숙성된 작가의 연륜은 우리에게 이별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이 그저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비록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갔지만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 함께 읽어 보세요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

★ 지난 여름 할아버지 집에서 : 사랑의 색깔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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