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었던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로 했어요. 히로가 묵묵히 구덩이를 파고 있는 동안 가족들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뭐하고 있는지 묻는 엄마에게 히로는 ‘구덩이를 판다’고 얘기했어요. 여동생 유키는 같이 파고 싶어 했지만 히로는 ‘안된다’고 말했죠. 구덩이로 무얼 할지 묻는 친구 슈지에게는 ‘글쎄’하고 답했고요. 서두르지 말라는 아빠 말에 ‘흠’ 하고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어요.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귀 뒤에서는 땀이 흘러내려도 히로는 멈추지 않았어요. 땅 속에서 기어 나온 커다란 애벌레와 마주치고 나서야 히로는 하던 일을 그만 두기로 합니다.

구덩이 안은 조용했고 흙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어요. 벽에 생긴 삽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는 히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갑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히로가 구덩이 속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동안 가족들이 차례로 다가와 물었어요. 뭐하는지 묻는 엄마에게 히로는 ‘구덩이 안에 앉아있다’고 답했어요. 연못을 만들자는 여동생 유키 말에는 처음처럼 ‘안 된다’고 대답했고요. 함정으로 쓸 건지 묻는 친구 슈지에게는 ‘글쎄’하고 답했죠. 꽤 멋진 구덩이라면서 칭찬하는 아빠에게는 처음처럼 ‘흠’하고 한숨만 내뱉고는 계속 앉아 있었어요.

히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덩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훨씬 높아 보였다.
그 하늘을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가로질러 날아갔다.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서 바라본 구덩이만 한 파란 하늘, 그 작고 동그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나비 한 마리. 그것은 온전하게 히로가 만든 히로만의 완벽한 세상입니다. 비로소 훌훌 털고 일어나 구덩이 밖으로 나온 히로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생각했어요.

‘이건 내 구덩이야.’

히로는 천천히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어요.

한가한 어느 일요일 아무런 목적 없이 혼자만의 시간에 완벽히 몰입해 본 히로는 이제 알게 되었을 거예요. 구덩이가 메워져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건 영원히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지는 일상 속에서 조용하고 묵묵하게 삶을 돌아보고 즐기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히로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따스한 햇살 한 줄기처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줍니다. 마음 깊은 곳 작은 구덩이 하나쯤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힘들고 지칠 때 푹 쉬었다 돌아올 수 있도록, 언제고 포근하게 나를 안아줄 수 있도록……


구덩이
책표지 : Daum 책
구덩이

다니카와 슌타로 | 그림 와다 마코토 | 옮김 김숙 | 북뱅크
(발행 : 2017/09/30)

작은 구덩이 안에서 히로가 올려다본 하늘은 저런 모양이었겠죠. 똑같은 하늘도 구덩이 속에서 바라보면 뭔가 달라 보이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 히로, 평범한 나비의 날갯짓 조차 그 순간만큼은 새삼스럽게 보였을 거예요. 구덩이를 처음처럼 돌려놓았지만 이제 히로는 알고 있어요. 히로의 구덩이는 언제나 히로와 함께한다는 사실을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하나쯤 품고 있을 자신만의 구덩이 이야기를 어느 한가한 일요일 히로의 이야기로 잔잔하게 담아낸 그림책 “구덩이”. 일본의 국민시인으로 불릴 만큼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단아하고 잔잔한 글에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그려진 와다 마코토의 그림이 이야기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구덩이”는 1976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겨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의 보편적 정서는 변치 않는다는 것을 이 그림책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에요.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2 Replies to “구덩이

  1. 어릴적엔 ‘내용도 별거 없고, 그림도 단순한 이런책 나도 만들겠다!’ 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흑.
    지금은 죽기전에 딱 한권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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