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모자

처음에는 모자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생겨났어요.

여자 아이가 쓴 분홍 모자는 어느 노부인의 손에서 태어났어요. 한 코 한 코 대바늘로 정성스럽게 모자를 뜬 노부인은 분홍 모자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뜨거운 찻주전자 손잡이를 감싸는 용도로도 썼고 책 읽을 때 발을 덮는 용도로도 분홍 모자를 사용했죠. 고양이가 분홍 모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 창밖으로 던져지는 바람에 분홍 모자는 나뭇가지에 걸렸다 유모차를 탄 아기에게로, 또 다시 어느 강아지에게로, 그리고, 강아지를 산책 시키러 나온 여자 아이에게로 옮겨갑니다.

단순한 모자였던 분홍 모자는 고양이의 놀잇감도 되고 아기를 감싸는 이불보도 되고 강아지의 장난감도 되었어요. 여자 아이는 지저분해진 분홍 모자를 깨끗이 빨아 말려서 머리에도 쓰고 야구 글러브로도 쓰고 베개로도 쓰고 권투 글로브로도 쓰고 붓을 담는 장바구니로도 씁니다.

어느 날 무언가를 몹시 기다리며 창밖을 지켜보던 여자 아이는 자신의 분홍 모자를 쓰고 종이를 챙겨들고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어요. 거리에는 여자 아이처럼 분홍 모자를 쓴 사람들이 함께 무리 지어 걷고 있었어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분홍으로 생각하기’, ‘여자 아이 힘’, ‘여성의 권리는 인권’, ‘사랑 그리고 희망’, ‘우리의 권리는 평등하다’, ‘미래를 여는 여성주의’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 여자아이처럼 머리에 분홍 모자를 쓰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행진합니다. 처음 분홍 모자를 떴던 노부인도 창가에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고 있어요. 분홍 모자와 똑같은 색깔의 분홍 스웨터를 입고서요.

분홍 모자의 여정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림책 첫 장면에는 무료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노부인의 이웃에서 여자 아이가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부인의 손에서 탄생한 모자 하나가 긴 여정 끝에 우연히 가까이 사는 여자 아이에게 전달 되어 행복을 선물하면서 노부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웃집 여자 아이에게 아주 멋진 선물을 하게 되죠. 또 행진하는 무리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분홍 모자가 스쳐간 사람들이 있어요.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일지라도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과 얽히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분홍 모자는 여성 인권의 발전사이기도 해요. 처음 집 안에 머물렀던 분홍 모자는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집 밖으로 나간 분홍 모자는 나뭇가지에 걸리고 구겨지고 얼룩이 묻지만 점차 원래의 쓰임새 외에 다양한 역할로 변신합니다. 마침내 분홍 모자는 소외되고 고정된 역할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소리 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분홍 모자를 쓰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다 같이 행진하는 마지막 장면은 실제 2017년 1월 21일 세계 곳곳에서 분홍 모자를 쓴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여성공동행진(Woman’s March)‘을 벌였던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다음 날로 여성 인권 수호와 인종 차별을 반대하며 세계 곳곳에서 손뜨개로 만든 분홍 모자를 쓰고 행진을 벌였다고 해요. 참가자들은 여성 권리를 지지한다는 연대 표시의 의미로 ‘Pussy Hat’을 떠서 쓰고 행진에 참여했고, SNS에는 #pussyhat 이라는 해쉬태그 운동도 일어났었다고 합니다.(참고 : PUSSYHAT PROJECT)

작은 행동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됩니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파도가 되듯이 말이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수많은 작은 물결의 힘을 믿습니다!


분홍 모자
책표지 : Daum 책
분홍 모자

(원제 : The Pink Hat)
글/그림 앤드루 조이너 | 옮김 서남희 | 이마주
(발행 : 2018/01/25)

“분홍 모자”는 검은색 선으로 그린 그림에 그림책의 제목이면서 주요 소재인 분홍 모자만 분홍색으로 그려 넣어 밝고 선명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어요. 분홍 모자를 갖게 된 사람들은 모자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용하면서 모자 하나 덕분에 아주 행복해합니다. 분홍 모자 하나가 세상을 행복하게 물들이는 모습 역시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들죠.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性)’ 안에 가두지 말고 능력과 역할에 대해 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세요. 분홍 모자가 집 밖으로 나가는 여정 속에 만난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고 다양한 쓰임새를 지니면서 자신의 능력을 무한하게 확장하게 된 것처럼요.

여자니까, 남자라서…라는 단순한 비교가 성을 떠나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며 우리가 꿈꾸는 세상 아닐까요?

나는 “분홍 모자”를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바칩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여성주의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때 ‘세계여성공동행진’은 내게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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