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를 올리고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
생각처럼 쉽지 않네.
좁은 길을 지나 골짜기를 넘어
커다란 바위를 만났어.
바위를 지나니 웅덩이
웅덩이를 넘으니 가파른 언덕.
다른 길로 갈까?
그만 내려갈까?
조금만 더 가자.
바람이 불 때까지.
여기가 어디지?
나는 뭘 하는 거지?
올라갈 수 있을까?
더 이상 한 걸음도 못 걷겠어.
길을 잃었나 봐.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산 위에는 정말 바람이 불까?
바람이 분다.
가드를 올린다.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서
다시
가드를 올리고.

링 위에 오른 두 명의 권투 선수, 이들에게 세상은 오로지 자신과 상대방 단 둘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상대방조차 오로지 나 자신과의 싸움을 위한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쉴새 없이 내 몸에 와서 꽂히는 상대방의 묵직한 주먹, 그 충격이 쌓이고 쌓이면 더 이상 일어나지 말라며 내 몸을 짓누르는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관중 하나 없이 텅 빈 여백 위에 목탄화로 그려낸 두 주먹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림책을 보는 이들에게 이들의 처절한 몸짓은 더 이상 링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내 삶과 겹쳐집니다. 그리고,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여기가 어디지? 나는 뭘 하는 거지? 올라갈 수 있을까? 더 이상 한 걸음도 못 걷겠어……. 라며 버티면서도 포기하고 싶어하는 빨간 주먹을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일어나라고. 다시 가드를 올리고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두르라고.

넘어지는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여전히 힘겹다. 때때로 나를 일으켜 준 이름 모를 권투 선수에게 이 책을 보낸다. 오늘도 일어서는 당신에게도.

“가드를 올리고” 뒤표지 중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넘어지는 것이 두렵나요? 다시 일어서기 망설여지나요?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 힘차게 다시 한 걸음 내딛으시겠습니까? 오늘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넘어지는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작가가 보내는 응원,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입니다.


가드를 올리고

가드를 올리고

글/그림 고정순 | 만만한책방
(발행 : 2017/11/20)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가드를 올리고”는 검은 주먹과 빨간 주먹의 치열한 권투 시합 장면을 목탄화로 담아낸 아주 인상적인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것은 오로지 두 사람, 그리고 두 사람의 주먹 뿐입니다. 관중 하나 없이 텅 빈 여백과 굵직한 목탄 선을 따라 휘두르는 주먹들의 움직임에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백 위로 흐르는 정상의 시원한 바람을 향해 오르는 이의 심정을 담아낸 글이 깊은 여운을 안겨줍니다.

2017년을 조금씩 마무리해가던 시기에 만났던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 설 연휴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다시 펼쳐 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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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들희
고들희
2018/02/20 14:02

저도 꽤 인상적으로 읽어서 이책을 소개한다면 어떻게 할까 망설였는데
아주 멋지게 소개 해주시네요. ㅎㅎㅎ

이 선주
Editor
2018/02/23 08:49
답글 to  고들희

“가드를 올리고” 글도 그림도 아주 인상적인 그림책이죠. 저는 그림책 다 읽고 뭉클해져서 눈물까지 났어요. ^^

봄산
봄산
2018/02/23 13:07

무조건 읽어보고 싶습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선주
Editor
2018/02/23 13:26
답글 to  봄산

가온빛 멤버 모두 만장일치로 ‘와~’했던 작품이에요.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유난히도 추웠던 올겨울을 이겨낸 이들에게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그림책이기도 하고요.

james kim
james kim
2024/01/09 03:29

우리의 심장이 다시 뛰게 하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다시 일어나게 하는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드를 올린다는 것은 날아올 주먹을 각오하고 이제는 쉽게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서려있는 몸짓이겠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제게 큰 도전과 용기를 준 작품입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보면서 많이 감사했습니다.

이 선주
Editor
2024/01/29 09:28
답글 to  james kim

넘어지는 상대도 일어서는 나도
서로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였다는 사실에 뭉클뭉클했던 그림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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