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아이구, 참 고생 징그럽게 혔네.
우리 집 냥반이 일찍 떠나는 바람에
내가 저수지에서 매운탕 장사 30년 했슈.
낚시꾼 실어 나르구 밥혀 주구.
낚시꾼들이 나보고 여자 뱃사공이라구 혔어.
그렁게 고생혔다구 울 애들이 잘 혀유.
우리 외손녀가 만날 전화해서 그려.
“할머니, 오래 살으세유. 사랑해유.”
“아이구, 울 애기 사랑혀. 울 애기 사랑혀.”

집도 안 고치구 이냥 우습게는 살어도 늦복은 쪼매 괜찮여.
이따가 온디야. 오면 이꽃 줄라구.

– 83세, 할머니

꽃 한 송이 들고 외손녀를 기다리는 여든셋 할머니. 들에 핀 예쁜 꽃 바라보다 ‘고 놈 참 우리 손녀딸 만큼이나 곱고 예쁘다!’ 생각하셨을 겁니다. 당신만 보시기엔 너무 아까우리만치 고운 꽃, 손녀딸 머리에 꽂아주면 울 애기 더 예쁘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마루 한 켠에 꽂아두면 오랜만에 온 손녀딸에게 쿰쿰하고 침침하다고 흉 잡히지 않게 집이 환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꺾어온 꽃 한 송이.

옹이지고 꺼끌한 손마디에 혹시나 상처 입을까 살포시 쥔 할머니의 손은 손주녀석들 어릴적 포실포실한 볼때기 하도 탐스럽고 예뻐서 만지고 또 만져보던 바로 그 손입니다. 예쁜 꽃 한 송이 살며시 쥐어든 손에 패인 거칠한 주름 하나하나마다 외손녀딸 기다리는 할머니의 설렘과 반가움이 배어 있습니다.

이 그림 보고 있자니 우리 장모님 손이 생각납니다. 한때는 하나밖에 없는 사위 챙기느라 바쁘셨던 장모님의 손은 요즘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 위하느라 사위 놈은 왔는지 갔는지도 모르십니다. 신혼 시절 엄마 사랑 빼앗긴 아내가 투덜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저도 딸아이에게 밀려 처갓집 가면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라는……

밭일이며 집안 살림 할 때는 더 없이 억세고 강한 손, 아이들 돌볼 때는 한 없이 보드랍고 따뜻한 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셰프의 손, 무명천 한 자락으로 아이들 명절에 입을 고운 꼬까옷 지어내는 재단사의 손, 내 새끼 내 손주 잘되게 해달라 손금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순례자의 손, 주름 한 줄 한 줄 굽은 마디 하나하나마다 겪어온 삶의 풍상 새겨진 손, 오랜만에 찾아오는 외손녀를 기다리며 설렘 가득 꽃 한 송이 들고 있는 할머니의 바로 그 손입니다.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김혜원 | 그림 최승훈 | 이야기꽃
(발행 : 2018/09/17)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충남 부여군 양화면 송정리에서 진행된 ‘그림책 마을’ 만들기 사업 과정에서 작가들이 보고들은 마을 어르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엮은 그림책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두 권의 송정마을 그림책 “우리 마을이 좋아”, “한 입만”들과 같은 제작 배경을 거친 작품인 듯 합니다.

사람은 말여, 뭣보다도 손이 곧 그 사람이여.
사람을 지대루 알려믄 손을 봐야 혀.
손을 보믄 그 이가 어트게 살아온 사람인지,
살림이 편안헌지 곤란헌지,
마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꺼정 다 알 수 있당게.
얼굴은 그짓말을 혀도 손은 그짓말을 못 허는 겨.

아홉 분의 할머니와 아홉 분의 할아버지의 손을 정성스레 그리고 그 속에 그 분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읽기 딱 좋은 그림책입니다.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2 Replies to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1. 이 책 일고 싶어지는 군요. 늘 좋은 그림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 고들희 님 취향이 저랑 많이 비슷하신것 같습니다. 가드를 올리고, 파랑 오리, 내 마음이 부서져 버린 날 등 댓글 달아주신 책들 모두 제가 맘에 쏙 들어했던 책들입니다. ^^
      본문에도 썼지만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이 가을에 읽기 딱 좋은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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