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주먹은 술을 마신다.
매일매일 술을 마신다.
술 취한 혓바닥이 엄마와 나를 불렀다.
술 취한 주먹은 고개를 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엄마와 나를 마구 두들겼다.

나는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며
취할 수 없는 내 주먹과 내 발과 내 혓바닥을
저주했다.

날마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빠. 어젯밤의 그 두려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빠는 새로운 폭력을 몰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무서워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쳐다보질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해대고,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눈을 아빠에게 향하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며 주먹질을 해대는 아빠. 엄마는 그런 아빠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저 나란히 선 채로 무기력하게 당하는 또 한 명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문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엄마 혼자 남아서 아빠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견뎌내기엔 역부족이었으니까요. 엄마 곁을 지키며 아빠가 휘두르는 폭력을 서로에게서 덜어주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지켜주려 했던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엄마가 없으면 아빠의 주먹이 덜 취할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아빠의 주먹은
엄마가 사라지자 더욱 힘이 세졌다.

혼자 남은 나는 아빠의 술취한 주먹을 오롯이 받아내며 견딥니다. 취할 수 없는 나의 주먹과 내 발과 혓바닥을 원망하며…

아빠의 술친구

이제 더 이상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도 없어졌지만 선뜻 떠나지를 못합니다.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맞닥뜨릴 세상의 삐딱한 시선들이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놈 주정뱅이 싸움꾼네 아들 아냐? 저 집 여편네가 매를 못견디고 결국엔 도망갔다면서… 지 새끼도 버리고…

아빠는 내 몸뚱이에 싯퍼런 멍자국을, 엄마는 내 마음에 싯커먼 아픔을 물려주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내 몸과 마음엔 부모가 남겨준 낙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느덧 아빠의 주먹질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고, 내 주먹도, 내 발과 혓바닥도 술에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빠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집을 떠났습니다. 내 부모가 남겨준 낙인을 감추고 살아가기 위해, 그저 평범한 이웃으로 나의 이웃들 사이로 들어가 살아가기 위해.


아빠의 술친구

아빠의 술친구

글 김흥식 | 그림 고정순 | 씨드북
(발행 : 2019/01/14)

“아빠의 술친구”는 가정 폭력을 다룬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지는 그림책입니다. 피해자가 겪는 아픔이 단순히 폭력으로 인한 고통뿐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동정과 연민으로 포장된 채 ‘저 놈도 자라면 지 애비처럼 되겠지’라고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들은 그들의 상처를 헤집는 또 하나의 폭력일 겁니다.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기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나 역시도 아빠처럼 매일 밤 술에 취한 채 살아가지 않을까? 나 역시도 술만 마셨다 하면 닥치는대로 주먹을 휘두르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나를 기다리는 빈 술통이 떠올랐다.
나의 주먹 나의 혓바닥 나의 두 눈
내가 담기길 기다리는 빈 술통.

두려움에 떨며 내뱉은 주인공의 마지막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집어삼켰던 그 끔찍한 술통이 자기 자신조차 삼키려 들까봐 어두운 구석에서 몸서리 치고 있을 이 세상 어딘가의 그 누군가들에게 건네는 응원입니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우리는 결코 아빠와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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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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