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난
겨울, 지금에야 나는 보았네.
푸르던 그늘 아래 벌레 먹은 자리들
가지를 잃은 상처들
상처마다 무심한 딱정이들
견디다 견디다
살갗에 새긴 깊은 주름들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난
겨울, 지금에야 나는 보았네
비로소 꽃도 잎도 열매도 아닌,
저 나무가 햇살에 빛나는 것을
조용히 웃고 서 있는 것을

지난 여름 푸르르던 이파리들과 그 가운데 화사한 자태 뽐내던 꽃송이들, 그 뒤로 가지마다 튼실하게 매달렸던 탐스런 열매들. 그런데 한 해 지나도록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있었음을 겨울이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꽃과 잎과 열매들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던 나무가 있었음을.

꽃 잔치 받쳐주던 잔가지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파리들 돋아나라고 한 뼘이라도 더 뻗으려 애쓰던 가지의 끝들, 그리고 꽃과 잎과 가지들을 지탱해주던 굳건한 줄기와 억센 뿌리들. 가을로 한 해가 저물며 단풍 들고 낙엽 진 뒤 내린 서리 끝에서야 그들의 노고의 흔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벌레 먹은 자리, 가지 잃은 상처 위의 딱정이들, 줄기 위로 패이고 패인 깊은 주름들을.

꽃이 지고 열매를 거둬들인 자리에 이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나무가 서 있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지켜왔던 그 자리에. 그리고 이제서야 그 고마움에 축축해진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나무가 빙그레 웃습니다. 이 겨울을 견디고 나면 다시 또 푸르름과 시원한 그늘, 그리고 달콤한 열매를 내어주겠노라 다짐이라도 하는 것 마냥 묵직한 웃음입니다. 나무의 그 조용한 웃음이 마치 ‘괜찮아? 괜찮아!’하고 도리어 나를 위로하는 듯 느껴집니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견디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의 시간을 나눠주는 그림책, 내 삶은 가지와 줄기와 뿌리에 충실한 삶이었는지 돌아보게 해주는 그림책 “겨울, 나무”입니다.


겨울, 나무

겨울, 나무

김장성 | 그림 정유정 | 이야기꽃
(발행 : 2020/05/25)

“겨울, 나무”는 나무의 한 해 살이를 통해 나와 내 삶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그림책입니다. 작가들은 독자들을 한겨울 헐벗은 나무 앞에 마주서게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가장 나다운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지금 겨울 나무 앞에 서 있나요? 그럼 나무의 음성이 들릴겁니다. 가지처럼, 줄기처럼, 뿌리처럼 살아가자고 하는 잔잔한 나무의 음성이.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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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John
2021/01/12 11:52

겨울나무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눈을 맞으며 비바람에도 오롯이 견디어내는 나무
그런데 겨울 나무는 그야말로 나무의 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1년 새롭게 시작하는 가온빛이 더욱 활발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선주
Editor
2021/01/12 21:01
답글 to  John

한결같이 가온빛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 가득한 2021년 되세요~
(잊고 있었던 겨울나무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어요.^^)

sunmi kim
sunmi kim
2021/01/15 11:26

매주 금요일마다 선물같은 이 메일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너무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선주
Editor
2021/01/17 20:04
답글 to  sunmi kim

선미님의 금요일에 가온빛이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어 행복해요.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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