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어쩌면 그는 이 고요 속에서 자신이 소년이었던 때를,
들판에서 놀던 때를,
이 길을 산책했던 때를 추억했는지도 모른다.

푸른 안개가 내려앉은 아침 앙리는 찬찬히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면서. 결혼사진, 아내, 입맞춤, 낡은 사진 속에 남아있는 오래전 그때를 잠시 떠올려봅니다. 창밖을 보던 그는 자신이 안갯속 까치밥나무 열매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짙푸른 안개 가득한 앞마당을 서성여봅니다. 추수가 끝난 밀밭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소리, 침묵의 호수, 비의 향기를 실어 오는 바람,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언제나 텅 빈 우편함. 오늘도 그의 우편함은 텅 비어있습니다. 앙리의 일상이 고요하게 펼쳐집니다. 그의 하루가 흘러갑니다.

벤치에서 잠을 자고 있던 고양이 털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그는 문 아래에 ‘돌아올게요’라고 썼어요.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집 나무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렇게 잿빛 심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나의 아버지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잘 몰랐던
모든 아버지에게

그림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구예요. “까치밥 나무 열매가 익을 때”는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만든 그림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작가는 남겨진 흔적들을 따라가며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를 떠올려 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림책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그가 남긴 작은 흔적들을 따라갑니다.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온기를 느껴봅니다. 삶은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 아닐까요? 늘 걷던 언덕 길 사이로, 계절이 오가는 풍경 속으로, 손때 묻은 물건들 속으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으로…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원제 : Quand Les Groseilles Seront Mures)
글/그림 요안나 콘세이요 | 옮김 백수린 | 목요일
(발행 : 2020/10/22)


미세한 감정들로 연결된 그림책 곳곳에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회한이 사무치게 배어있는 듯합니다. 지그시 눈 감고 서로에게 기대어 교감하는 고양이와 앙리,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장면은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다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한 번쯤 다정하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의 고백서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무한하다 생각했던 순간들이 지난 후 맞이하게 될 생의 마지막 순간,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싶을까요?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요?

이 선주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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