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면소재지에 있는 작은 학교가 첫 발령지였습니다. 아직 군대도 다녀 오지 않은 초임 선생님은 부임한 이듬해에 6학년 여자반을 맡습니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가던 시절이라 젊은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을 진학시키겠다 마음 먹으며 의욕에 차오릅니다.

그런데, 반 아이들 중 보선이란 아이가 매일 선생님 책상에 예쁜 들꽃을 가져다 줍니다. 농사나 집안 일에 아이들도 한 몫을 해야 하는 산골 마을, 보선이는 수업하다 말고 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수업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입니다. 예쁜 들꽃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져다 주는 보선이의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번번이 수업을 빼먹고 장에 가거나 일찌감치 집에 가버리는 아이가 괘씸하기도 합니다.

어느 토요일엔가 선생님은 보선이에게 학교 끝나고 집으로 찾아갈테니 감자나 넉넉히 삶아 놓으라고 하십니다. 보선이 부모님을 만나 중요한 시기이니 아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가족들이 도와달라는 의논을 할 요량이었을겁니다.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은 보선이네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해 놓고 자전거를 끌고 여유롭게 나섭니다.

하지만, 날이 저물도록 선생님은 보선이네 집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산길을 가도 가도, 산등성이를 넘어도 넘어도 보선이네 집은 나오질 않습니다. 선생님은 집에 가려고 학교를 나서는 보선이의 손에 손전등이 들려 있는 것을 가끔 보곤 했는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문제라도 더 풀고 가게 하려고 못가게 붙잡을 때마다 어린 보선이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생각하니 가뜩이나 어두운 산길에 눈앞이 더 깜깜해집니다.

어두운 산길을 얼마나 지나 왔는지도 모를만큼 한참만에야 저 멀리 보선이네 마을 불빛이 보입니다. 이 먼 길을 매일 두 번씩 땀을 뻘뻘 흘리며 오갔을 아이 생각에 선생님은 목이 메입니다. 이 먼 길을 오면서도 선생님을 위해 들꽃을 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보선이의 마음이 너무나도 예쁘고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처럼 ‘보선아~’하고 소리질러 아이를 부릅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보선이네 마을 불빛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들꽃 아이

선생님이 보선이네 집에 다다랐을 땐 열시가 이미 넘어 있었습니다.

그곳엔 다섯집뿐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0년 전 학교가 생긴 이래 마을을 찾아 준 이론 김 선생님이 처음이라는 거였습니다. 감자떡이며 메밀묵, 옥수수술 같은 귀한 음식들과 꽃향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꿀 대접을 받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열두 시가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선생님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당 앞을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더 맑게 들려오고, 열린 방문 너머로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또렷이 눈에 비쳤습니다.

선생님은 자꾸만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선이가 먼길을 지나 학교에 오가는데 여름 밤의 어두움보다 더 큰 장애물은 한겨울의 눈이었습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보선이는 어쩔 수 없이 결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며칠째 쉬지 않고 눈이 왔습니다. 결국 보선이는 졸업식 조차 오지를 못합니다.

들꽃 아이

졸업식을 마친 선생님은 군대에 가야 합니다. 정든 아이들과 학교와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 오는데 그칠줄 모르고 내리는 눈이 선생님은 원망스럽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들꽃을 가져다 준 보선이에게 줄 ‘안네의 일기’는 결국 직접 주지 못하고 옆반 선생님에게 전해달라 부탁합니다. 눈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선생님의 시선은 저 멀리 산너머 보선이네 마을에 가 있는 듯 합니다.

창밖엔 어젯밤부터 내리던 눈이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보선이도 지금 그 눈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김선생님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고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창밖을 내다 보는 마지막 장면은 그림책 “엄마 마중”에서 하루 종일 전차 내리는 곳에 나가 엄마를 기다렸던 꼬마가 드디어 엄마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려 왠지 아득해지는 듯 한 느낌… 하지만, “엄마 마중”에서의 눈은 엄마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눈이지만, “들꽃 아이”의 눈은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얄궂고 원망스러운 눈입니다.


김동성 작가의 다른 그림책 : 엄마 마중 / 책보 / 오빠 생각

작가 이야기 : 김동성 – 서정적 판타지


들꽃 아이
들꽃 아이

임길택 | 그림 김동성길벗어린이
(발행 : 2008/07/10)

“들꽃아이”는 그림책보다는 어린이 동화책에 더 가깝습니다. “엄마 마중”에서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하도 좋아서 그가 그림 작업에 참여한 책들을 찾아 읽다 만난 책입니다. 역시나 그림이 하도 좋아서 ‘오늘의 그림 한장’을 통해 소개합니다. 아이들 그림책보다 글 분량은 더 많지만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좋은 책입니다.

글을 쓴 임길택 시인은 실제로 교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와 동화를 썼던 분입니다. 오랜 시간을 산골마을과 탄광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곳에서 접한 순박한 삶을 시와 동화를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책의 말미에 임길택 시인 본인이 “들꽃 아이”에 대해 언급한 글이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이 인용문만으로도 충분할 듯 합니다.

“들꽃 아이”에 나오는 보선이도 실제 아이다. 이름 또한 그대로 썼다.

지금 아이들이 보선이가 걸었던 길을 잃어버렸다는 게 안타까워 이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길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잃어버린 거나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 임길택 산문집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보리출판사) 중에서

Mr.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덕분에 그림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앤서니 브라운은 아닙니다. ^^ 이제 곧 여섯 살이 될 딸아이와 막 한 돌 지난 아들놈을 둔 만으로 30대 아빠입니다 ^^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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