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곰들과 늑대들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애국심으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결심으로 서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적뿐입니다. 그 외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쳐다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건 작은 애벌레 하나. 가로막았다고는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애벌레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니, 조국의 존망이 걸린 이 순간에 작은 애벌레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겠죠.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껏 단 한 번도 배우거나 경험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소를 위해 대가 희생하는 것을, 개인을 위해 집단과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과 평화는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날 때부터 우리의 DNA 속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애국심을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지고 말았지만 자극이 주어진다면 언제든 세뇌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애벌레가 바로 그 자극입니다. 양쪽 진영에서 애벌레에게 시선을 돌린 곰과 늑대가 하나씩 생겨납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그들 마음 속에서도 무언가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 들불처럼 그들 사이로 번져나가기 시작할 겁니다.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 곰과 늑대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진정한 평화를 꿈꾸게 될 때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꿈과 희망의 날갯짓으로.

애국 애족, 그것이 강요에 의한 것이건 자발적인 것이건 상관 없이 그 틀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그림책, 그러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것들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그림책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선생님의 시가 우리들 마음에 뿌린 평화의 씨앗이라면 김규정 작가의 그림은 그 씨앗을 싹 틔우게 할 흙입니다. 그 씨앗과 흙이 일구어낸 결실을 함께 나누고 이 세상에 널리 퍼트리는 것은 이 그림책을 본 우리들의 몫입니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 그림 김규정 | 개똥이
(발행 : 2021/10/11)

“애국자가 없는 세상”은 권정생 선생님의 시로 만든 그림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글로 만든 그림책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지금껏 나온 책들은 글을 참 잘 그려냈다는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의 글에 놀랐지 그림에 놀란 적은 없었으니까요. 반면 김규정 작가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은 글 이상입니다. 선생님의 시를 빼고 그림만 남겨두더라도 충분히 훌륭합니다(물론 작가에게 애벌레의 자극을 준 선생님의 시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죠). 아마도 그림을 통해 선생님이 뿌린 평화의 씨앗으로 싹을 틔워낸 김규정 작가의 마음가짐이 남다른 덕분 아닐까 생각됩니다.

분단된 땅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우린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증오와 대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그 씨앗은 애국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몸 깊숙한 곳 여기저기에 뿌려졌고, 우린 스스로를 충실한 흙이 되기 위한 존재라 생각했다. 아마 그 시절 ‘평화’라는 말을 천국만큼이나 무감각하고 이상적인 말로 여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이 쓴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은 그런 우리를 느리지만 끊임없이 쟁기질하게 했다. 덕분에 뒤집힌 흙에는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이제 그 흙을 조금씩 나누려 한다. 이 흙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콩도 심고, 감자도 심고, 언젠가 들꽃도 피어날 것이다. 그런 풍성하고 작은 밭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 김규정

참고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은 2000년 11월에 격월간지인 <녹색평론> 55호에 발표되었고,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에도 실렸습니다(“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에 출간되었던 산문집으로 선생님의 1주기를 맞아 <녹색평론>에 발표되었던 선생님의 글 몇 편과 <녹색평론> 95호 권정생 추모특집에 실렸던 두 편의 글을 추가해 2008년에 재발간되었습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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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기
물꼬기
2021/11/19 08:59

에디터님의 글을 보니 책이 더 깊게 와닿네요. 그리고 글도 그림도 정말로 감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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