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 : 2022/01/17
■ 마지막 업데이트 : 2022/01/29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제목이 특이합니다. 스페인어 제목을 직역하자면 ‘단 한 번도 자랑한 적이 없는 쥐 이야기’ 정도? 영어판 제목은 ‘The True Story of a Mouse Who Never Asked for It’으로 출간된 언어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입니다.

이 책의 이야기의 원형은 ‘잘난 체하던 쥐가 고양이와 결혼해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는 스페인의 민담입니다. 작가들은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서 ‘잘난 체 하지 않는다면 쥐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참고로 글을 쓴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는 구전문학 전문가라고 합니다(우리 옛날 이야기를 수집하러 전국 방방곡곡 할머니들을 찾아 다니는 신동흔 교수와 비슷한 일을 하나 봅니다).

100여 쪽의 대부분은 쥐와 고양이의 이야기입니다. 단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하얀 쥐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어느 날 그 쥐는 고양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고양이의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가 하면 늦은 밤 몰래 빨래를 하다가 다치기도 합니다. 그런 아내가 애처로운 남편 고양이가 아내를 치료해 주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아내의 상처를 꿰매 줄 실을 구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혀로 아내인 쥐의 상처를 핥아주는 남편 고양이…

고양이와 결혼한 쥐의 이야기지만 쥐와 고양이가 함께 등장하는 건 딱 한 장면 뿐입니다. 왜냐구요? 쥐와 고양이는 같은 공간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어야만 하고, 쥐는 고양이를 보면 무조건 도망쳐야만 하는 운명이니까요. 비록 운명의 장난으로 고양이와 결혼하긴 했지만 결국은 정해진 결말을 벗어나지 못한 쥐의 이야기…

그렇게 쥐가 운명의 희생양이 되고 난 후 다음 장은 아무 것도 없는 순백의 상태입니다. 마치 다음 막이 새로 열리길 기다리는 연극 무대처럼 말이죠. 어떤 이야기가 더 남았을까 호기심 가득 안고 드리워진 순백의 장막을 걷어내면 한 여자가 빨간 벽에 기댄 채 아수라장이 된 집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순간 절망스러워 보이지만 조금 더 지켜보면 차분하면서도 비장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디어 결심이 선 것일까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도 아닌 나 자신으로 나답게 살아가기로 말입니다.

여자는 어질러진 집안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길러왔던 긴 머리를 손수 잘라냅니다. 그리고 차분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꿈, 자신의 삶, 자신의 이야기를 한 장 한 장 그립니다. 창 밖으로 길이 보입니다. 지금까지는 여자가 어디를 가건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길이었지만 이제 그 길은 이 세상 어디건 여자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어주는 길입니다.

고양이 발톱 사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쥐들에게
–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와 비올레타 로피스는 오랜 세월 여자를 억누르는 용도로 활용되었던 이야기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며 그 대상을 굳이 여성으로 제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 안의 나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누군가에게 기댄 채 나를 찾는 데 소심하기만 한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강요받으며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바로 지금이야!’ 라고 말하는 그림책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원제 : La verdadera historia de la rata que nunca fue presumida)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 | 그림 비올레타 로피스 | 옮김 정원정, 박서영 | 오후의소묘
(2021/12/31)

남성들이 아무리 역차별 운운해도 여전히 이 사회에서 여성은 약자입니다. 사회구조적인 차별 문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늘 위험에 처해 있는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이 사회로부터 당하는 오래된 폭력의 역사를 비판하는 도구로 오랜 세월 남성들이 써먹었던 옛이야기를 활용한 건 신의 한 수 아닐까 생각됩니다. 잘난 체 하는 쥐는 고양이에게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를 가져다 ‘잘난 체 안 하면 안 잡아 먹기는 하고?’라고 되물으면서 말이죠.

이 책이 비올레타 로피스와의 다섯 번째 만남인데 지금껏 단 한 권도 같은 그림체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할머니의 팡도르”와 같은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죠. 어떤 생각과 어떤 의도로 그림 하나 하나를 그렸을까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작가란 생각이 듭니다. 독자보다 글 작가가 더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자신의 글이 그림으로 이렇게 표현될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을 독자들보다 글 작가가 제일 먼저 받을 테니까요.


※ Violeta Lópiz, 비올레타 로피스? 비올레타 로피즈?

2017년에 출간된 “더 나은 세상 –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는 열한 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함께 만든 어린이 인권 그림책입니다. 비올레타 로피스도 그 중 한 명이었죠. 산하 출판사가 당시 ‘Lópiz’를 ‘로피스’로 표기했었는데, 2019년에 오후의소묘에서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내놓으며 ‘로피즈’로 표기합니다. 2020년에 나온 “노래하는 꼬리” 역시 ‘로피즈’로 표기했구요. 그런데 오늘 소개한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에서는 ‘로피스’로 표기했네요. 옮긴이가 바뀌었나 봤더니 모두 정원정, 박서영 두 번역가가 작업했습니다. 처음 들여온 곳에서 ‘로피스’로 표기한 걸 굳이 ‘로피즈’로 바꾼 것까지는 그 책을 몰라서 그랬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여지껏 ‘로피즈’로 표기하던 걸 이번에는 왜 또 ‘로피스’로 바꾸었을까요?

재미있는 건 ‘비올레타 로피스’로 검색하건 ‘비올레타 로피즈’로 검색하건 국내에 비올레타 로피스의 그림을 처음 소개한 “더 나은 세상 –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는 검색되지 않는다는 겁니다(품절이나 절판 상태도 아닌데 말이죠). 출판사들이 이런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독자들이 혼선을 빚지 않도록 일관성을 지켜주었으면, 자신들이 내놓은 책에 대한 유지 관리에 조금 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이 아니라 ‘2021년 어린이책 베스트 25’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의 띠지와 온라인 서점들의 출판사 제공 정보에는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021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 10권에 이 책의 제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에 가서 확인해보니 ‘The 25 Best Children’s Books of 2021’에 선정되어 있더군요. 덕분에 어제 주문한 염혜원 작가의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주니어RHK)도 이 목록에 선정된 걸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출판사 제공 정보를 다시 확인해보니 이 출판사는 ‘뉴욕타임스는….2021 올해의 그림책 중 하나로 선정’이라고 표시했네요.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과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2021년 어린이책 베스트 25’는 선정 대상 도서도, 선정의 주체도 전혀 다릅니다.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행복은 어디에나 있어”는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이 아니라 ‘2021년 어린이책 베스트 25’에 선정된 책들입니다.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기에는 굳이 그런 타이틀들의 도움 없이도 독자들이 새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작가 비올레타 로피즈에게 미안한 일 아닐런지… 정작 비올레타 로피즈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뉴욕타임스의 ‘2021년 어린이책 베스트 25’에 선정된 소식을 기분 좋게 공유해 놓았던데 왜 출판사는 굳이…


※ 출판사의 입장

어제 인스타그램에 누군가 가온빛을 태그했다고 알림이 떠서 확인해보니 오후의소묘 출판사에서 작가 이름 한글 표기와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 관련해서 언급하셨더라구요. 이 문제에 대한 출판사 입장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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