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

텅 빈 교회에 홀로 앉아 있는 여우 할아버지, 기도하러 온 것 같기는 한데 어리둥절한 표정은 왜일까요?

한창 때는 하루에 아기 염소 일곱 마리를 잡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으르렁대며 달려 드는 사냥개 따위는 빨대 하나로 가볍게 따돌리던 멋진 여우였지만 세월 앞에 장사 있나요?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 여우가 되자 하얀 턱수염이 무성해지고, 이빨도 빠지고, 기억력도 점점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요일도 늘 헷갈려요. 여우 할아버지는 일요일인 줄 알고 교회에 갔지만 사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왜 거위 성가대가 노래 부르러 오지 않는건지 여우 할아버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둥절한 여우 할아버지의 표정, 텅빈 의자 위로 드리워진 여우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여우 할아버지의 증세는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젠 사냥을 하러 가다가도 뭐 하러 나왔는지 까먹기 일쑤예요. 집으로 가는 길도 찾지 못하고, 사냥개들이 쫓아 와도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 큰일 날 뻔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여우라는 사실도 잊어 버리고 맙니다.

이제 여우 할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

옛날에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여우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느낄 수는 있었어요.
꼬마 여우들이 상처를 핥아 주면 기분이 좋아졌어요.
꼬마 여우들이 가져다준 먹이를 먹으면 배가 불렀지요.
꼬마 여우들이 사냥 이야기를 들려주면 재미있었어요.
특히 빨대 하나로 사냥개를 속이는 영리한 여우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여우 할아버지에게는 힘든 일도 몇 가지 있었어요.
혼자서는 동물들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혼자서는 집으로 가는 길도 찾지 못했어요.
혼자서는 잠이 들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여우 할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꼬마 여우들이 늘 곁에 있었거든요.

여우 할아버지의 전성기 시절, 젊고 멋진 여우는 꼬마 여우들에게 자신의 영웅담을 들려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꼬마 여우들은 여우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며 멋진 여우들로 자라났죠. 그리고, 듬직한 어른 여우로 자라난 그 꼬마 여우들이 이제 여우 할아버지를 돌봅니다. 어릴 적에 여우 할아버지가 자기들에게 들려줬었던 빨대 하나로 사냥개를 따돌리던 이야기를 다시 여우 할아버지에게 들려 주면서 말이죠.

자신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꼬마 여우에게 가르쳤던 여우는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되고, 어른이 된 꼬마 여우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짧은 우화를 통해 작가는 세대간의 화합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그림책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였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
책표지 : 푸른숲주니어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

글/그림 마르틴 발트샤이트 | 옮김 박성원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독일아동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독일의 그림책 작가 마르틴 발트샤이트는 “우리 모두가 1등이야“라는 그림책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짤막하면서도 재미난 우화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그 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냥을 나섰다가도 뭐 하러 나왔는지 잊어 버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여우라는 사실 조차 잊어 버리게 되는 여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걸 느낄까요? 꼬마 여우들이 기억을 잃어버린 여우 할아버지를 정성스레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는 또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이 그림책을 보는 것만으로 혹시나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아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거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아이들이 꼬마 여우들처럼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이해하고 돌봐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공유한 추억들이 있어야만 할겁니다. 빨대 하나로 사냥개를 따돌린 이야기를 해 준 여우 할아버지와 그 이야기에 재미나게 빠져든 꼬마 여우들처럼 말이죠.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 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여우 할아버지의 삶의 지혜를 배운 꼬마 여우들이 어엿한 어른 여우로 성장하고 여우 할아버지를 돌보게 된 것 처럼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삶의 지혜를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장애 함께 알기 프로젝트 4. 알츠하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