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일 : 2015/06/22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06/22


우리는 6.25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참혹한 역사와 함께 이산과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65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전쟁의 쓰라림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남북 분단과 대립은 이미 아이들에게 무감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분단된 내 조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구요. 60여 년 전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전쟁 역시 피부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전쟁은 결코 과거의 일로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종교나 민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가르쳐줘야만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가 지구촌 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꿈꾸며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쟁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아닌 평화와 공존의 가치였음을 우리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분단의 아픔을 통해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평화 그림책 여섯 권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고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보세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권정생 | 그림 이담 | 보리
(발행일 : 2007/07/12)

치악산 자락 어느 깊은 골짜기에 밤이 찾아듭니다. 둥근 달이 떠올라 사방을 비출 무렵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산마루에 걸터 앉습니다. 하나는 아홉 살 남짓 된 어린아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군 복장을 한 어른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곰이, 인민군의 이름은 오푼돌이라고 합니다.

곰이는 가족과 함께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피난 행렬 틈에서 엄마 아빠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걷던 곰이 머리 뒤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전투기의 폭격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앞다투어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하지만 곰이는 머리가 띵해지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무섭고 끔찍했는지 곰이는 오푼돌이 아저씨 가슴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오푼돌이 아저씨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회상합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나선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용감히 싸우던 끝에 오푼돌이 아저씨는 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남쪽과 북쪽에서 산다는 것 말고는 다른 것 하나 없는 다 같은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건만 왜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었던 건지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지난 날의 쓰라린 기억 탓인지 오푼돌이 아저씨의 가슴께에서 피가 흘러 내립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곰이가 아저씨에게 묻습니다.

“왜 그랬어요? 왜 서로 죽였어요?”

오푼돌이 아저씨는 곰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 먼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다 그만두고 옆에 있는 소나무 둥치를 끌어안고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북받치는 회한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오푼돌이 아저씨를 곰이가 부둥켜 안고 달랩니다.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는 아까 일어났던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둘이 쓰러진 자리엔 둘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고 마른 억새풀 사이에 앙상한 진달래꽃 가장이가 듬성듬성 서 있고, 꽃송이가 애처롭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치악산 골짜기는 모든 것이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이렇게 만나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삼십 년이란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아홉 살 곰이에게 갑자기 삼십 년의 세월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궁금하신가요? 사실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한국 전쟁 당시 치악산 자락에서 목숨을 잃은 원혼들입니다.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우리 강산 구석구석엔 이처럼 죄없이 스러져간 영혼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무덤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귀한 목숨과 맞바꿔 치러낸 전쟁이지만 여전히 허리가 잘린 채 남과 북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쓰럽습니다.

첫 번째 평화 그림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는 보리출판사의 ‘평화 발자국’ 시리즈의 문을 연 첫 번째 책이기도 합니다. 책 뒷부분에 인용된 권정생 선생님의 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의 한 구절엔 평화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거기엔 정말 전쟁이 없었으면
빼앗아만 가는 임금도 없었으면
전쟁에 쫓겨 쫓겨 가지 않았으면
모두가 자유롭고 사랑이었으면


소년 정찰병

소년 정찰병

(원제 : Patrol – An American Soldier In Vietnam)
글 월터 딘 마이어스 | 그림 앤 그리팔코니 | 옮김 이선오 | 북비
(발행일 : 2011/12/05)

베트남 열대의 습한 정글 속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숨죽이며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습니다. 주변의 작은 소리에도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채 밀림을 헤쳐 나가는 군인들의 모습, 갑작스레 울려퍼지는 총성은 군인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마을에서 만난 평범한 노인들조차 그들의 눈엔 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병사의 독백이 들려옵니다. 자신들 외의 모든 것이 적으로 간주되는 첨예한 상황 속에서 병사의 읊조림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병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두렵습니다. 사방으로 날아드는 총알이 자신만은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나무에 기대어 자기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나무에 기대어 있는 적을 상상합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병사는 갈대밭에서 적과 조우하게 됩니다.

저기에 적이 있다!
적도 나를 보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놀란다.
당황스럽다.
그는 너무 어리다.

우리는 먼 거리를 두고 노려본다.
그는 내가 먼저 총을 들어 그의 적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가 먼저 총을 들기를 바란다.
나는 그가 방향을 바꾸길 바란다.
심장이 터질 듯 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다.

탁탁탁,
침묵을 깨는 헬레콥터 소리가 들린다.
적은 방향을 바꾼다.

나는 총을 든다.
나는 사라지는 그림자를 겨눈다.
나는 그의 적이다.
나는 총을 내린다.

병사는 갈대밭 사이로 맞닥뜨린 적과 똑같은 무게의 공포와 증오, 그리고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갈대밭을 사이에 둔 채 두 병사는 상대방에게 먼저 총을 겨누지 못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살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손에 총을 든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고,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
낮이 열기를 밤에 넘겨 줄 무렵……
나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적도 지금 편지를 쓰고 있을까?
나는 너무 피곤하다.
나는 이 전쟁이 정말 너무 피곤하다.

정의감으로 들끓는 가슴을 안고 월남전에 참전한 한 병사의 고백과도 같은 글은 그 어떤 동기로도 전쟁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아군과 적군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전장의 참혹함과 전쟁의 광기를 고발하는 한편,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는 평화 그림책 “소년 정찰병”이었습니다.


장벽

장벽

(원제 : Wall)
글/그림 톰 클로호지 콜 | 옮김 김하현 | 국민서관
(발행일 : 2015/06/04)

2015 가온빛 BEST 101 선정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인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높다란 장벽이 세워집니다. 갑자기 세워진 장벽은 베를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한 가족에게 이별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아버지는 장벽 서쪽에서, 주인공 소년과 나머지 가족들은 장벽의 동쪽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별의 아픔을 겪는 이들은 이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베를린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과 자유를 찾아 차가운 장벽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삼엄한 경비를 뚫고 성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벽 너머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지내던 소년 역시 숲 속으로 몰래 숨어들어 땅굴을 파기 시작합니다. 땅굴이 완성되자 소년은 가족들을 이끌고 아버지를 찾아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잔뜩 숨죽인 채 땅굴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소년과 가족. 하지만 땅굴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소년과 가족을 비추는 차디찬 불빛.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섬뜩한 군인의 목소리……

소년과 가족은 무사히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요?

베를린 사람들에게 이산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미국과 소련이 제 멋대로 세운 38선이 우리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지도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건만 남과 북의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체제와 이념의 차이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물리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마저 변질시킬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평화 그림책 “장벽”은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했다고 합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통일을 이뤄낸 후 지난 날 겪었던 아픔을 돌아보며 희망을 꿈꾸는 그림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그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래봅니다.


전쟁광과 어느 목수 이야기

전쟁광과 어느 목수 이야기

(원제 : El Cuento Del Carpintero)
글/그림 이반 바르네체아 | 옮김 유아가다 | 고래이야기
(발행일 : 2014/03/25)

옛날 옛적에 솜씨 좋기로 유명한 피르민이라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바퀴를 만들면 그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한두 해 지난 뒤에야 나타날 정도였다는군요.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남작의 전령이 찾아옵니다.

남작의 부름을 받고 가보니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남작이 자신의 팔을 새로 만들어 달라는 거였어요. 솜씨가 뛰어난 피르민이 남작을 실망시킬리 없겠죠? 피르민이 새로 만들어준 팔이 마음에 쏙 든 남작은 새 팔을 끼고 또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 다음엔 왼팔, 그 다음엔 두 다리를 번번이 잃고 돌아오는 남작. 피르민은 그 때마다 새 팔과 새 다리를 만들어주지만 전쟁에 집착하는 남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잃을 거라곤 머리와 몸뚱이 밖에 남지 않았지만 남작은 나무로 만든 두 팔과 두 다리를 끼운 채 또 다시 전쟁에 나갑니다. 그리고 얼마 후 피르민은 또 다시 남작에게 불려갑니다. 이번엔 머리를 잃고 돌아온 남작…… 아무리 피르민의 솜씨가 좋다고 해도 과연 잘려나간 머리까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몇 주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피르민이 새로 만든 남작의 머리를 들고 나타납니다. 모두가 긴장한 채 바라보는 가운데 피르민이 나무로 만든 남작의 머리를 제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지 지켜보며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긴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작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나무 팔과 나무 다리를 쭉 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예전처럼 적들을 찾아 나설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치의와 남작부인, 총리 그리고 추기경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목수에게 다가가 한 명씩 돌아가며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피르민에게 금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건네며 기쁘게 말했다.

“훌륭하군, 목수 선생! 훌륭해! 이 나무 머리는 정말이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거 같네!”

솜씨 좋은 피르민도 사람의 머리만큼은 다시 살려낼 수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평화를 위한 피르민의 선택이었을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미망인이 된 남작부인과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뛸듯이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평화로운 표정의 나무로 된 남작의 머리를 보며 이전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할 정도로 말이죠.

이야기 중간중간에 피르민이 얼마나 뛰어난 목수인지를 보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어른들에겐 허풍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아 나도 피르민 아저씨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다!’ 라며 부러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도 기쁜 일이겠지만 온 국민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평화 그림책 “전쟁광과 어느 목수 이야기”였습니다.

참고로 이 그림책엔 솜씨 좋은 목수 이야기, 평화에 대한 메시지 외에도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피르민과 남작네 하녀와의 달콤한 사랑이랍니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엔 군인들이 무기 대신 악기를 들고 평화로이 연주를 하고 있고 그 앞으로 피르민과 하녀가 다정하게 산책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광 남작 덕분에 남작의 저택에 자주 드나들며 서로 마음이 통했나보네요 ^^


적

(원제 : L’ennemi)
다비드 칼리 | 그림 세르주 블로크 | 옮김 안수연 | 문학동네
(발행일 : 2008/07/25)

사막처럼 사방이 훤하게 트인 너른 벌판 위에 두 개의 참호가 대치하고 있습니다. 참호라고 해봐야 작은 구멍이 전부입니다. 그 안에는 각각 병사 한 명씩 남겨져 있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적 때문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자신의 참호를 지키는 두 명의 병사. 그리고 그 중 한 명의 독백으로 그림책 “적”의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전쟁이 처음 시작되던 날 병사는 총 한 자루와 전투 지침서를 받았습니다. 전투 지침서에는 적은 인간이 아니라 야수와 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존재라고 나와 있습니다. 병사는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 이웃, 조국을 야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지금껏 싸워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참호 속에서 바라본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병사는 생각에 잠깁니다.

별을 바라본다면 그 역시 아무 소용없는 이 전쟁 따위는
어서 끝내야 한다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그가 저 별을 바라본다면 깨달을 수 있을 텐데요.
별을 보면 누구나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병사는 자신이 먼저 전쟁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먼저 전쟁을 끝내더라도 적은 자신을 죽일 겁니다. 왜냐하면 적은 인간이 아니라 야수니까요.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기에 적이 먼저 전쟁을 끝내기만 한다면 평화롭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얼마 후 병사는 이 전쟁을 반드시 끝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참호 밖으로 기어 나가서 적의 참호로 향합니다. 마침내 적의 참호에 도착한 병사는 적을 죽이기 위해 뛰어듭니다. 하지만 적은 온데간데 없고 자신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적의 참호 속 모습에 당황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적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 듯 합니다. 지금쯤 적은 병사의 참호로 뛰어들었을겁니다. 병사를 죽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말이죠.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적의 가족 사진입니다. 적도 가족이 있나봅니다. 아니 어떻게 가족이 있는 사람이 죄없는 여자와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음엔 낯익은 전투 지침서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이 받았던 것과 똑같습니다. 다르다면 적의 전투 지침서에 나온 적의 얼굴이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 하지만 병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야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의 참호 속에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적의 참 모습을 보게 된 병사는 조금씩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야수가 아닌 것 처럼 적 또한 야수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는 것만큼 적도 전쟁이 끝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지난 밤 보았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며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평화 말입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병사는 종이에 편지를 적고 나서 빈 병에 넣은 후 자신의 참호를 향해 던집니다. 그 순간 자신의 참호에서도 병사를 향해 편지가 담긴 병 하나가 날아오릅니다. 각각의 병에 담긴 편지 속엔 과연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다비드 칼리와 세르주 블로크의 콤비는 역시나 명불허전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이야기로 전쟁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평화 그림책 “적”.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친구를 사귀는 법과 어쩌면 같은 것 아닐까요? 바로 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겁니다. 지금껏 적이라고 여겼던 상대방을 향해 자신의 진심을 담은 편지가 들어있는 병을 던진 그림책 속의 두 병사처럼 말입니다.


※ 함께 읽어보세요

Mr.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덕분에 그림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앤서니 브라운은 아닙니다. ^^ 이제 곧 여섯 살이 될 딸아이와 막 한 돌 지난 아들놈을 둔 만으로 30대 아빠입니다 ^^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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