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입은 늑대

팬티 입은 늑대

(원제 : Le Loup En Slip)
윌프리드 루파노 | 그림 마야나 이토이즈 | 옮김 김미선 | 키위북스
(발행 : 2018/08/20)


화면 안쪽으로 뛰어나오려던 검은 늑대, 독자를 보고 놀라기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늑대 하면 떠오르는 카리스마 있고 우직해 보이는 느낌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모습이에요. “팬티 입은 늑대”라는 그림책 제목도 코믹하게 느껴지는데요. 이 어리숙해 보이는 늑대는 숲속 동물들에게 본의 아니게 커다란 오해를 샀다고 합니다.

팬티 입은 늑대

숲속 동물들은 산꼭대기에 사는 늑대를 엄청나게 두려워했어요. 다들 온몸이 얼어붙을 듯 살벌한 울음소리와 무시무시한 눈빛을 가진 늑대가 숲으로 내려오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죠. 금방이라도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일 것 같은 그런 포스를 지니고 있는 이 늑대는 아무리 보아도 표지에서 본 늑대는 아닌 것 같아요. 고독한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 늑대는 표지에서 본 비쩍 마르고 어리숙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늑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거든요. 뭔가 고독하고 음산한 느낌, 바로 우리가 늑대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팬티 입은 늑대

숲속 동물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늑대에 대한 대비를 아주 철저히 했어요. 늑대를 잡을 올가미를 팔고 늑대를 막을 울타리도 팔고 늑대 경보기도 팔았죠. 늑대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태권도 수업도 한창이네요. 늑대 관련 신문, 늑대 범죄 소설, 늑대가 무서운 이를 위한 견과류도 팔고 있어요. 나무 둥지 이곳저곳에 각종 사라진  동물을 찾는다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어요. 마을이 온통 산꼭대기 늑대에 대한 공포로 가득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숲속 동물들은 늑대의 모든 것에 관한 강좌를 통해 늑대를 연구하고 값비싼 세금을 내서 늑대 잡는 용감한 부대도 만들었어요. 숲속 동물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늑대 잡는 부대가 있는 한
우린 안심하고 살 수 있어!
물론 우리가 값비싼 세금을 내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지.

팬티 입은 늑대

하지만 늑대가 나타났다는 토끼의 외침에 모두가 혼비백산, 늑대 잡는 용감한 군인들조차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었네요. 초록빛으로 풍성하게 빛나던 숲속은 늑대라는 말 한마디에 노랗게 변했고 공포로 질린 숲속 동물들은 일순간 모두 잿빛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들 꼭꼭 숨어 그 공포의 늑대를 조용히 지켜보았어요. 늑대의 등장에 숲은 피바람이 불어닥친 것처럼 붉은 색깔로 변합니다. 늑대의 커다란 코, 번뜩이는 눈빛…… 다들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어요. 아니, 아주 많이 이상했어요.

팬티 입은 늑대

전신을 드러낸 늑대의 모습은 이제껏 숲속 동물들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거든요. 흐리멍덩한 눈빛에 빗자루 같은 털,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줄무늬 팬티까지. 이제껏 이런 늑대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숲속 동물들이 따져 묻자 오히려 늑대는 자신이 산꼭대기 늑대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늑대에 관한 공포심은 아주 작은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었어요. 오해는 뜬구름 같은 소문으로 이어지고 부풀려지면서 더욱더 큰 공포를 만들어 낸 것이었죠. 눈으로 늑대의 실체를 확인한 숲속 동물 친구들, 이제 오해를 풀었으니 모두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늑대의 기나긴 사연을 다 듣고 난 숲속 동물들은 잿빛이 되어 다 같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큰일났다!

팬티 입은 늑대

멧돼지는 이제 늑대 대비용 울타리를 못 팔게 될까 걱정이고, 사슴 박사는 ‘늑대 공포증 이겨 내기’ 강연이 끝장이 난 것 같아 두렵습니다. 신문, 덫, 군인들까지 늑대 이야기를 뺀 숲속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삼삼오오 모여서 할 이야기조차 없어져 버렸어요. 공포감을 조성해 먹고살았던 동물들에게는 정말 큰일이 난 셈이죠.

그 모습을 본 팬티 입은 늑대가 이렇게 말했어요.

잠깐!
그동안 내가 무서워서 힘들었던 거 아니야?
내가 무섭지 않다는 걸 알았는데도
왠지 더 힘들어 보인다?
도대체 왜 사는 거야?
두려움이 삶의 이유야?

나는 산책이나 마저 해야겠어.
그렇게 계속 걱정이나 하며 살아!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쓸쓸한 모습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숲속 동물들, 공포가 사라진 숲에 또 다른 형태의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실체를 확인하지 않고 마구 뿌려대는 가짜 뉴스, 근거 없는 선동, 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집단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사라졌던 동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림책 속 마지막 반전을 꼭 확인해 보세요.

프랑스 만화 시나리오 작가인 윌프리드 루파노의 풍자 가득한 이야기에 그림 작가 마야나 이토이즈는 인간 사회 조직을 의인화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다양한 색상으로 상황의 변화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늑대의 말처럼 우리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클릭 한 번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빠른 세상에 사는 우리들,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냉철한 판단력이 절실한 시대임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팬티 입은 늑대”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