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거리

하루거리

글/그림 김휘훈 | 그림책공작소
(발행 : 2020/01/30)


‘하루거리’는 말라리아모기에 물려 감염되는 급성 열성 전염병인 ‘학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요.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는 병이라 그림책 제목이 생소하게 느껴질 아이들이 많을 것 같네요.

순자, 분이, 기수, 정혜, 미옥… 엄마나 할머니 전화번호 수첩에서 보았을 법한 정겨운 이름의 아이들이 그림책 속에 등장해요. 똑단발이나 더벅머리 상고머리를 하고 검정 몽당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있어요. “하루거리”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서로 돕고 살아가는 훈훈한 마음이 살아있던 시절, 그 시절의 이야기예요.

하루거리

잔뜩 헝클어진 더벅머리에 치마 군데군데 기운 자국, 머리에 커다란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이가 순자예요. 다친 다리를 고치지 못해 왼발을 잘름거리며 걷는 순자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큰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 또래 아이들을 보고는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사라지는 순자를 분이가 흘깃 돌아보고 있어요. 분이는 순자의 모습이 자꾸만 맘에 걸렸어요.

하루거리

한 번 마음이 쓰이기 시작하자 분이 눈에 자꾸만 순자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문득문득 순자의 딱한 처지가 생각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순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일을 하다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거나 꼼짝도 하지 않고 달구지에 누워있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저 딴 세상 아이인 양 멀리서 지켜만 보던 아이들은 그런 순자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고 순자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가까이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왜 저럴까 생각하던 아이들은 순자가 분명 하루거리에 걸렸다 생각했어요.

하루거리는 별안간에 춥고 으슬으슬 떨리는 병이야.
마치 몸살처럼 말이야.
그런데 꼭 하루걸러 도지는 병이라서 ‘하루거리’라고 했대.
오늘 괜찮다가도 다음 날이면 또 오들오들 꼼짝 못 하거든.

하루거리

아이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방법을 들고 홀로 하루거리를 앓고 있는 순자를 찾아옵니다. 물 한 바가지 꿀떡꿀떡 마시고 물할머니 물할아버지에게 낫게 해달라 빌기, 찬물에 적신 걸레로 깜짝 놀라게 하기, 냄새나는 뒷간에서 달걀 먹이기…

말도 안 돼~ 하고 놀랄만한 온갖 민간요법들이 총동원됩니다.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지만 나름 이유가 있는 비법들을 순자에게 시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함께 놀이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여요. 그러는 사이 어느새 아이들과 순자 사이에 놓여있던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어요. 어린 순자에게 지독하리만치 꼭 들러붙어있던 하루거리, 아이들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요?

하루거리

마음을 다해 외로운 순자에게 다가가는 아이들, 순자의 하루거리는 어쩌면 그들의 진실한 사랑에 사르르 녹아버리지 않았을까요? 사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훨씬 가까웠던 그 시절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선뜻 다가가 함께 어우러지며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고 친구를 생각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은 봄 햇살처럼 따사롭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부드러운 먹으로 그린 그림이 아련하게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들입니다. 이 그림책이 첫 작품인 김휘훈 작가는 할머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해요. 4년 동안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수백 장 고쳐 그린 담백하고 정갈한 수묵화 속에는 그 시절의 아이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현재의 우리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서로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그림책 “하루거리”, 사랑은 세상을 좀 더 세심하게 돌아보게 만들어요. 스러진 세상에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커다란 힘이에요.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2 Replies to “하루거리

  1. covid-19로 음산해진 우리네 삶터에 이 책이 많이 읽혀지면 좋겠네요…..

    1. 안녕하세요? 최대규님.
      서로 돕고 살아가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루거리”가 그래서 더욱 와닿는 듯한 느낌이에요.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