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오래된 사진들을 정리하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손주가 말합니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할머니’예요.
‘요세피나 플로렌스’라는 이름도 있어요.
꼭 피아노 소리 같죠.

할머니들이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할머니가 되기 전에는 엄마였고, 아가씨였어요.
그 전엔 소녀, 어린이, 아기였고요.
그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았죠.
세상에서 가장 작았답니다.

할머니에게 ‘할머니’란 이름 말고도 꼭 피아노 소리 같은 ‘요세피나 플로렌스’라는 이름이 있다는 손주 녀석의 말이 귀여우면서도 왠지모르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할머니에게도 한때는 작디 작은 아기였던 시절이, 물구나무 서기도 할 줄 알고 튜브 없이 바다에 떠있을 수도 있었던 소녀시절이 있었어요. 피아노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아가씨가 되어서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어요. 이웃집에 이사온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엄마가 됐고, 한참 뒤 손주가 태어나고 나서야 할머니는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이제는 가끔 물건을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거나 할머니 나이를 정확히 모르실 때도 있지만 할머니가 내 할머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토록 사랑했던 손주도, 집도, 자신의 방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할머니는 의자 뒤 걸려있는 오래된 정원 그림을 보면서 말씀하셨어요.

“난 나중에 저기서 살 거야.”
하지만 모두들 할머니에게 나중은 없다고 했어요.
아기였고, 소녀였고, 아가씨였던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죠.
할머니에게는 이미 오늘과 내일과 어제가 있으니까요.

나는 ‘할머니에게 나중이 없다’는 말은 믿지 않아요.
소녀였고 아기였던 할머니는 나중에 정원이 될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겠죠.
우리 할아버지 같은 사람 말이예요.
그리고 피아노도 있을 거예요.

할머니가 나중에 살고 싶은 오래된 정원은 젊은 할머니와 할머니가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피아노가 있는 곳이겠죠. 할머니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 오래된 정원은 아마도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일 것입니다.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책표지 : 고래뱃속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원제 : Josephina, een naam als een Piano)
야프 로번 | 그림 메이럴 아이케르만 | 옮김 최진영 | 고래뱃속

가온빛 추천 그림책
2015 가온빛 BEST 101 선정작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는 독특하게 손주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사진을 따라 할머니의 지난 날을 회상하는 그림책입니다. 지금은 쭈글쭈글한 주름에 머리카락도 하얗게 세어버렸지만 사진 속에는 할머니가 아기였던 시절, 소녀 였던 시절, 아가씨였던 시절, 엄마였던 시절, 그리고 손주가 태어나면서 할머니가 된 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작가이자 연극 연출자의 경험을 가진 야프 로번의 글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흑백 사진 속에 손주를 그려 넣어 할머니의 시간 속에 손주가 함께 하는 것처럼 그려낸 메이럴 아이케르만의 따뜻한 그림은 야프 로번의 잔잔한 글과 잘 어우려져 할머니의 삶을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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