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와 장수매

돌이와 장수매

글/그림 류재수 | 나미북스
(발행 : 2006/04/20)


노나메기 세상 꿈꾸던 통일바라기 백기완 선생의 장산곶매 이야기를 사할린 섬에서 만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동포 노인의 미소에 담아낸 그림책 “돌이와 장수매”. 표지 그림 속에서 아기 염소와 나란히 앉아 먼 하늘 바라보는 돌이가 그리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 고향을 두고 떠나온 이들의 막막한 그리움, 통일을 꿈꾸며 평화를 바라는 우리들의 갑갑한 그리움입니다.

돌이와 장수매

바닷가 양지 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작고 평화로운 마을, 이곳 뒷산 벼랑 위 소나무 숲에는 신비로운 매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매가 한 번 노려보면 제아무리 덩치 큰 짐승도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 버렸죠. 마을 사람들이 애써 잡은 물고기를 채 가는 날짐승들을 쫓아내 주기도 하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내다 보고 미리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매를 친근하게 여겼고,
모든 짐승들 중에 으뜸이라 하여 ‘장수매’라고 불렀습니다.

마을 어귀 오래된 당산나무에 치성 들이듯, 바닷가 작은 마을에 모여 사는 소박한 사람들은 가장 높은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매 한 마리를 ‘장수매’라 부르며 마음을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힘 없는 백성들이 폭정과 차별,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장수매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믿었던 사람들은 장수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날이면 왠지 힘이 났고, 먹잇감을 찾아 선회라도 할라치면 마을을 지키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믿으며 마음 든든해지는 걸 느꼈을 겁니다.

돌이와 장수매

어머니 따라 바닷가에 나온 돌이는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아기 염소와 놀고 있습니다. 한 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철 없는 돌이와 달리 갯벌에서 일하는 어머니들은 구름 한 점 빗줄기 한 방울에도 가슴 졸입니다.

해가 기울자 매가 마을 위를 몇 바퀴 돌더니 바다를 향해 천천히 날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며 돌이는 이제 곧 아버지가 돌아오겠구나 싶어 좋아라 합니다. 여지껏 마음 졸이던 어머니들도 이제야 조금 마음을 놓습니다.

돌이와 장수매

바다로 나갔던 배들은 한 척도 빠짐 없이 모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돛에 걸린 깃발은 마을 사람들에게 만선의 기쁨을 전하며 펄럭입니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도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장수매를 보고는 모두 바닷가로 달려나와 일손을 거듭니다.

먼바다로 고기잡이 나갔던 아버지들이 무사히 돌아온 그 이튿날 장수매는 바다 건너 넓은 들로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장수매가 마을을 비운 사이 집채만한 수리 떼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말리던 물고기며 가축들까지 닥치는 대로 채어가고 심지어 사람을 해치기도 했습니다.

돌이와 장수매

마을 사람들은 다들 “장수매라면 저 놈들을 당장 내쫓을 텐데…”라며 장수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장수매가 돌아옵니다. 초가지붕 위로 등장하는 장수매의 멋진 그림자. 반가움에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 외양간에 소마저도 장수매를 반깁니다.

매는 수리 떼 중 가장 몸집이 큰 우두머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사람들 눈에는 수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퍽!”하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깨진 수리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매는 달아나는 수리들을 쫓아가지 않고, 마을을 한 바퀴 휘 돌고는 소나무 숲으로 천천히 날아갔습니다.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돌이와 장수매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후 충분히 쉬고 배들을 모두 정비하고 나자 아버지들은 다시 가족을 두고 바다로 나갑니다. 헤어지기 싫어 응석 부리는 돌이를 달래는 아버지, 가족들의 걱정스런 얼굴에 아무 염려 말라며 안심시키는 아버지들. 배들 모두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도록 돌이도 마을 사람들도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돌이와 장수매

배가 돌아올 무렵 바다가 사납게 일렁입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폭풍이 가라앉고 날이 개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바닷가에 모여듭니다. 배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다 함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올 날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만신창이가 된 배들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이 아버지가 타고 나갔던 배만 보이질 않습니다. 폭퐁우에 방향을 잃고 헤매다 해적 떼를 만나 아버지가 탄 배가 그들에게 끌려갔다는 말에 돌이와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맙니다.

돌이와 장수매그 일을 겪고도 봄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셨지만 이따금 일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돌이의 마음은 찢어질듯 먹먹하기만 합니다.

돌이는 오늘도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바다는 고요했습니다. 수평선 너머 피어오른 구름은 어디론가 소리 없이 흘러갑니다. 아버지가 생각날 적마다 하나 둘 쌓아 올린 돌탑도 이젠 제법 커졌습니다.

그림책 초반에 어머니를 따라 바닷가에 놀러나온 돌이가 아버지를 기다리던 장면과 대조되는 그림입니다. 돌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어린 염소는 제 새끼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버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목이 빠져라 바다만 바라보던 돌이는 이제 고요한 바다를 제대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부엌에 홀로 앉아 시름에 잠겨 있을 엄마 생각에 자꾸 집쪽만 뒤돌아봅니다.

돌이와 장수매

그날 밤 돌이는 꿈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고기 잡이 나갔다 풍랑을 만났지만 돌이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꼭 안아주는 아버지가 곁에 있었고, 하늘을 뒤덮은 어둠을 힘찬 부리질로 쪼아주는 장수매가 있었으니까요.

꿈결에 들리는 탁- 탁- 장수매의 부리질 소리에 돌이는 깨어납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장수매가 사는 벼랑 위를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멀리 매가 보였습니다. 장수매가 마치 돌이를 알고 있었다는 듯 머리 위로 날아와 천천히 맴돌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수평선을 향해 점점 멀어져갑니다.

떠오르는 해 한가운데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장수매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서있는 돌이. 지금 돌이는 웃고 있습니다. 장수매의 묵묵한 위로 덕분에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삼켜내고 어머니를 지켜 드릴 힘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온몸이 훈훈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먼 하늘 바라봅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돌이는 작가가 그려낸 사할린 외딴 섬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바닷가 작은 언덕, 동포 노인 한 분이 앉아 고국을 향해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반세기를 앉아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슬그머니 다가가 그 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그저 멍해졌다. 상상과는 정반대로 그렇게 온화한 모습일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 분을 미소 짓게 했을까?

돌아온 나는 참담했고 한동안 자괴감에 빠졌다. 무엇인가 구하러 간 그곳에서 목격했던 상황들은 되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어떤 곳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곳곳에 스며 있는 이웃들의 비원을 외면한 채, 그 사회가 추구한다고 하는 안정과 번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006년 1월 류재수

코르사코프, 사할린 섬 맨 남쪽 끝 고국을 향한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의 바닷가에서 만난 동포 노인. 그 노인의 평화로운 미소에 담긴 온화함이 작가 류재수에게 던진 문제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작가가 그 당시 느꼈던 번민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을까요?


※ 현재 이산가족은 얼마나 될까?

통일부는 이산가족 남북교류 현황을 한 달 주기로 업데이트중인데 2021년 5월 31일 기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133,434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망자가 85,412명이고 생존자는 48,022명뿐입니다. 생존자 중에서도 80세 이상이 31,972명이나 되니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땅 밟아보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요원하기만 해 안타깝습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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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John
2021/06/25 10:03

이산가족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치 세력의 비인권적인 면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관계를 가로막게 하는지요. 그냥 내버려두면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장벽을 거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구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책임에서 예외일 수는 없지요. 우리가 주인인데…

가온빛지기
Admin
2021/06/25 23:00
답글 to  John

John님 오랜만에 뵙네요~ ^^
말씀처럼 이념이 다르더라도 혈육끼리 왕래하는 것만큼은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하는데… 저같은 3자의 마음이 이럴진대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싶어 더 마음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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